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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2001.08.19
제 목 :지식을 버린 자의 미로
본 문 :호세아 4장 1절 ∼ 6절
현대심리학 용어 중에 피터팬 신드롬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 많이 들으셨고 또 익숙하게 하는 말인 줄로 압니다. 이 피터팬이라고 하는 것은 J.M. Barrie라고 하는 분이 쓴 극입니다. 극본의 제목이 피터팬이요 그 극의 주인공이 피터팬입니다. 피터팬의 특징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영원한 소년’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몸은 컸지마는 마음은 소년입니다. 항상 동화의 세계에 삽니다. 빗자루를 타고 높이 날아다니는 그런 꿈속에 삽니다. 이러한 사람, 이런 군상을 흔히 피터팬 신드롬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병이냐 장애냐 하는 겁니다. 고칠 수 있는 병이냐 아니면 영영 disorder, 장애로 구제불능한 것이냐 하는 심각한 문제가 지금 우리 앞에 있습니다.
산업화에서 정보화시대로 바뀌는 과정에서 우리는 특별한 사람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머리 좋고 현실판단이 잘되고 그야말로 똑 소리나는 엘리트, 그런 엘리트가 대접을 받는 세상이 되어서 모든 부모가 모든 사람이 그러한 엘리트가 되어 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또 그렇게 가르쳐보려고 애를 씁니다. 냉정한 승부의식, 철저한 실용주의, 적자생존의 법칙을 적절하게 이용하며 변화에 즉각적으로 순발력 있게 대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키워보겠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을 만들어 보겠다고 부모님들이 안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똑똑한 현대인, 이런 신세대가 이상하게도 삼사십대가 되면서부터 뭔가 중요한 것이 결핍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주위에서도 이것을 알게 됩니다. 명문대를 나오고 컴퓨터에 능하고 기술능력이 탁월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 이런 사람들을 만나보면은 자기도취에 빠져있습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자기가 제일 잘났습니다. 아무도 인정하질 않습니다. 자기가 최고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그 원인은 대체로 봐서 부모들이 살기가 힘들어서 너무 바빠 가지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그러는 동안에 테레비가 TV가 아이들의 교육을 맡았습니다. 아이들의 세계를 다 뺏아가버렸어요 아이들은 아이의 세계에서 천천히 천천히 성장해야되겠는데 아이에서 바로 건너뛰어서 어른이 되고 말았어요. 어른의 세계 아직은 몰라도 되요. 뭐 알 필요도 없어요. 어쩌면 몰라야 되는 것까지 다 알아버렸어요. 여기서 겉은 어린아이인데 속은 영감님이에요. 너무 많이 알아요. 깜짝 놀랄 만큼 너무 많이 알아요. 이것이 병이에요. 모를 건 몰라야 되는데 말이에요.
자, 그런데 이런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으로 가는 과정을 무시해버렸어요. 그리고 건너뛰어서 기술자가 되었어요. 자, 몸은 어른인데 속은 여전히 어린아이요. 그리고 부조화를 이루고 계속 철부지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몸은 어린이일 때 벌써 마음은 어른이더니 몸이 어른이 되가지고는 이제는 마음이 여전히 어린아이입니다. 여기에 존재의식도 없고 정보처리능력이 없고 그 많은 지식을 소화하지를 못합니다. 여기서 파티클맨(Particle Man)이라고 하는 미립자 인간이 나타나게 됩니다. 사회심리학자는 이것을, 이 엘리트를 미립자 인간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직도 동화의 세계를 날아다니며 피터팬처럼 착각과 오해 속에 살아갑니다. 이것은 구제 불능한 병입니다. 이것은 병이 아니라 이제는 장애가 아닌가, 치료할 수 없는 병이 아닌가하고 이 시대가 지금 걱정을 합니다. 앞으로의 세대를 예측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고등학생들을 통계적으로 내보니깐 우리 나라에도 무려 11.5%가 가출을 해본 경험이 있답니다. 그러니까 뭐 아이들이 한번 가출을 했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을 하지 마세요. 그 왜 가출할 것 같습니까? 내가 몸이 이만큼 컸는데 또 내가 다 아는 게 많은데 이까짓 거 내가 부모의 간섭을 받으며 이 고생할 거 없다 뛰쳐나가서 뭔가 해볼 것이다. 나가보니 그렇지 않더라구요. 차라리 부모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부모 밑에서 얻어먹는 것이 낫지 밖에 나가보니까 이게 무섭더라구요. 이게 동화의 세계가 아니에요. 이게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기어 들어오는 아이는 소망이 있고 그냥 나가버린 즉은 이거는 영영 피터팬이 되고 마는 것이죠. 그래서 유명한 오스카 와일드는 그의 저서 가운데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없는 교육이란 현명한 악마를 키우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우리는 귀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도다.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도다. 현대인은 많은 것을 아는 거 같아요.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상에서 꼭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는데 그 소중한, 유언과 같은 그 말씀 중에 첫째가 “하나님이여 이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주 신중한 말씀을 하셨어요. 아주 뜻깊은 말씀입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똑똑하다고 생각했어요. 자기들이 누구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했어요. 가야바같은 사람은 요한복음 11장에서 말합니다. ‘너희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무사할 수 있다면 죽는 거지 뭐 생각할 여지가 있느냐.’ 이렇게 결단하고 이렇게 결정을 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너희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잘났어요. 자기가 제일 잘났어요. 자기가 제일 똑똑해요. 그러나 결정적인 실수를 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입니까? 그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그러나 저는 가장 지혜로운 자로 가장 똑똑한 자로 자처하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예수님은 판단하십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죄, 모든 실수,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알아야 뜻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현대는 know how는 있습니다 know what이 없어요. 혹 know what이 있으나 know why가 없습니다. 그렇게들 말합니다. 지식이 힘이요 지식이 능력이건만 참 지식이 없어서 정말로 알아야 할 것을 몰라서 세상은 어지럽고 자기자신도 불행해집니다. 가장 귀중한 것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알아야되는데 세상은 알고 나는 모르고 있어요. 또한 미래를 알아야 합니다. 현재가 그냥 머물러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젊은 사람 항상 젊습니까? 오늘 건강하다고 항상 건강합니까? 오늘 사업이 잘된다고 항상 잘될 것입니까? 세상이 이렇게 정신 못차리게 급히 변하고 있는데 우리가 미래를 모른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거죠. 아무 소용도 없는 거죠. 그런고로 우리는 보다 더 먼 미래를 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 되고 또 하나는 최우선을 알아야 되요. 어차피 우리는 다 알 수도 없고 다가질 수도 없고 다 할 수도 없어요. 그 중에 제일이 무엇인지, 가장 First Priority, Number One, 제일 최우선적인 것이 무엇인지 그걸 알아야죠. 다른 건 다 몰라도 되요. 이건 알아야 됩니다. 그걸 모른다면 나머지 것은 다 소용없는 거죠. 또한 한계를 알아야 됩니다. 요새 인간들이 한계를 모르고 지금 교만하게 행하는 것이 불안스럽습니다. 과학발전,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 한계가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정해주신 피조물의 세계는 피조물대로의 한계에 사는 것이요. 무제한의 세계로 도전하려고 드는데 이것이 망상이올시다.
또 하나는 은혜를 알아야 됩니다. 요새 컴퓨터에서 클릭하는 것처럼 만사가 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모든 것이 내 지혜로 내 노력으로 내 기술로 되는 것처럼 착각을 하는데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며 깨닫는 게 뭡니까? 은혜로 되는 것이죠. 오직 은혜로 세상에 있고 오직 은혜로 내일이 있는 것이에요. 은혜를 모르는 자는 아무 것도 모르는 거예요. 은혜를 부인하고 사는 사람은 그 사람은 피터팬이에요. 그 신드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기독교 교육학자인 Parker J. Palmer라고 하는 분은 지식의 근원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호기심과 통제의 의한 지식을 말합니다. 이것은 주체가 나요 세상 전부가 객체가 됩니다. 내가 보고 내가 깨닫고 내가 실험하고 그리고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지식은 사랑과 상호주관성에서 오는 지식입니다. 이것은 내가 객체가 되고 상대방이 주체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이란 내가 연구해서 아는 게 아니고 그가 나를 사랑하므로 내가 아는 거예요. 사랑 받으므로 사랑을 아는 거예요. 인식의 주체가 객체예요. 나 자신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다려야 되요. 이것은 시간이 필요해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러한 지식이라는 것은 인격적입니다. 만남의 관계에서 오는 겁니다. 책상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있죠. 그것 가지고는 안돼요. 컴퓨터 가지고 배울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에요. 인간을 알고 사랑을 합니다. 그것은 만남의 관계에서 조용히 인격적으로 배워가는 것입니다. 이 지식이 없는 것이에요. 또한 참여와 책임에서 얻는 지식입니다. 동참합니다, 함께 합니다, 책임을 집니다, 작은 일부터 책임을 져 나아가면서 인격적으로 성장해갑니다. 공동체 의식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혼자가 아닙니다. 여러 사람 속에 내가 하나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자기가 우주의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게 바로 피터팬 신드롬입니다. 그런가 하면 순종을 통해 배웁니다. 여러분 다 알고 하는 거 아니에요. 믿고 하는 거죠. 다 알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다 합리적으로 소화가 되어야 되는 게 아니에요. 어린아이가 어른의 세계를 어떻게 다 압니까? 그 다 알 수도 없어요. 지금은 순종을 해야 되요. 신뢰와 사랑으로 순종해가면서 배우고 깨닫는 것이죠. 그 오묘한 이치예요. 이 같은 숭고한 지식이 점점 멀어지고 오로지 과학적 지식만을 내놓는 것이 현대인의 결정적인 잘못이에요. 누가복음 19장 4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감람산 언덕에 앉아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며 예루살렘의 장래를 보시면서 모름지기 40년 후에 있을 일을 이렇게 내려다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기 예수님이 눈물을 흘렸다고 돼있어요. 기가 막힌 거예요. 이 40년 후에 돌 하나가 돌 위에 첩 놓이지 아니하고 철저하게 망해 없어질 것을 내다볼 때에 예수님은 가슴이 아팠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들은 돌이키지를 못해요. 평화에 관한 일을 몰라요. 그런 고로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너희가 지식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지식이 없는 게 아니에요. 있는 지식을 버렸기 때문에 이제 다른 지식을 얻을 수가 없게 됐다는 것입니다. 무식은 심판입니다. 지식을 버렸습니다. 아는 일을 행하지 않습니다. 현대인 똑똑한 엘리트는 알기만하고 말만 많아요. 행동할 줄을 몰라요. 이것이 얼마나 나쁘다는 걸 남보다 더 잘 알아요. 그리고도 거기에 머물고 있어요. 단 하나를 실천하지 못해요. 이것이 현대젊은이의 결점이에요. 실천의지가 없어요. 어쩌면 뻔히 망할 짓만 하고 앉았어요. 지식을 버렸어요. 여러분, 이미 틀린 것은 틀린 거예요. 거기에 지식이 있어요. 그러면 버려야죠. 여기다가 미련을 둘 필요가 없어요. 요새 제가 읽고 있는 책 가운데 보면 그런 책이 있어요. “대붕괴 신질서” 프란시스 후쿠야마라고하는 분이 쓴 겁니다. 대붕괴, 무너져야 될 것은 무너져야 되요. 빨리 헐어버려야 되요. 여러분, 잘 알지 않습니까? 나라도 정치도 경제도 개인도 인격도 지식도 이미 잘못됐어요. 기초가 잘못됐어요. 이거는 벌써 무너진 거예요. 벌써 망한 거예요. 그러면 버려야죠. 그걸 자꾸 일으키겠다고 수혈을 하면 되겠습니까? 다 틀린지가 언젠데 끝난 지가 언젠데 그걸 붙들고 있는 겁니까? 이건 다함께 망하는 것이죠. 역사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래서 구조 조정이라는 게 뭡니까? 망할 것은 치워버리라 그거 아닙니까. 이미 망한 것은 걷어버려! 아니 뻔하고 언제 망한 지가 오랬는데 거기다가 계속 투자하고 계속 나라 돈을 쳐놓고 있으니 이 나라가 망할 수밖에! 안그렇습니까? 개인이나 세상이나 마찬가지로 지식을 버렸어요 왜 버렸느냐? 욕심 때문에 그 알량한 체면 때문에 그 쓸데없는 고집 때문에 뻔한 것을 붙들고 있는 거예요. 지식을 버렸어요. 그런 고로 회계가 없어요. 회계란 뭡니까? 완전히 무너뜨리는 거예요.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희를 버릴 것이다. 심판입니다. 나도 너를 버리겠다고 심판하십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하십시다.
한 장을 넘겨서 호세아 6장 1절을 제가 보겠습니다. 6장 1절에서 보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시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는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치셨으나 다시 세워 주실 것이요 그 진노적인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시는 말씀을 따라 얻은 지식을 버리지 말고 지식 안에서 회계하고 지식 안에서 바로 서야됩니다. 그리할 때 새로운 미래가 약속되는 것이올시다.
하나님을 알 때에 나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미래를 알고야 현재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야 나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종말을 알고야 현실을 밝히 볼 수 있는 이것이올시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물리학자로 세상을 떠나게 될 때 너무 나이가 많아서 다,요새말로 말하면 치매가 와서 다 잊어버렸어요. 자기 나이도 자기 생일도 몰라요. 너무 답답해서 제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지금 선생님이 알고 계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내 구주 되신다는 것 이 두 가지는 내가 확실히 알고 있지”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것 다 몰라도 좋아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가 내 구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거예요. 그 여호와를 힘써 알 것이요. 그럴 때에 우리 앞에 새로운 미래가 전개되는 것이올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는 계속 말씀하시고 계시건만 우리는 말씀을 외면하고 우리에게 소중한 지식을 주었지만 지식을 거역하며 산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주의 진리를 따라 행할 수 있게 하시고 주께서 말씀하시는 지식을 따라 오늘도 실천궁행하며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주여 주님을 먼저 알고 주님이 말씀해주신 말씀 속에서 확실한 진리를 앎으로 해서 내일이 있고 장래가 있고 영원한 세계가 있는 그런 생을 오늘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