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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2001.04.08
제 목 :찬미를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
본 문 :마태복음 21 : 12 ∼ 17
얼마 전에 저는 한 장례식을 집례한 일이 있습니다. 일상적인 방법으로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설교하고 그리고 축도하고. 그러한 일상적 방법으로 장례식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예배 끝난 후에 아주 점잖게 생기신 그런 신사 한 분이 제게 가까이 찾아와서 진지하게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고인과 개인적 인연이 있어서 오늘 이 장례식에 참여했는데 기독교 예식으로 진행되는 장례식을 생전 처음 보았습니다. 그리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는 두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는 “기독교인들은 장례식에서도 노래를 부르누만요.” 이분이 찬송이라는 말을 모르거든요. 그분의 귀에는 노래로 들리는 거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장례식에서도 노래를 부릅니다”그래요. “그렇습니다” 대답했습니다. 조금 후에 더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기독교 교리에 부활이 있고 영생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만은 추상적인 진리로 그렇게 받는 줄 알았는데 오늘 목사님의 설교와 교인들의 반응을 보니까 진짜로 부활을 믿고 있고 영생을 사실적으로 믿고 있구만요.” “아, 그러믄요” 대답했습니다. “바로 이 두 가지가 기독교 교리에 핵심입니다. 그게 중심 교리입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더 이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깊이 생각을 하시더니 그 다음 주일부터 교회 나옵니다.
여러분, 이것이 가장 중요한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흔히 말하는 Last Suffer, 마지막 만찬을 잡수십니다. 제자들은 그 뜻을 다 몰랐습니다만은 예수님은 알고 계십니다. 이것이 마지막, 마지막 만찬입니다. 문자 그대로 마지막 만찬입니다. 그래 떡을 가지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잔을 가지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피다.” 한 말씀, 한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이요, 얼마나 중요한 시간입니까? 이렇게 마지막 성만찬 예식을 행하시고 이제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십니다. 여기서 체포되고 십자가를 지시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자유가 있다면 지금 바로 겟세마네 동산을 향하여 나아가시는 거기까지가 자유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체포돼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습니까? 예수님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을 향해 가시면서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찬미하며 가니라.” 찬송이 나올 수 있을까요? 십자가를 바라보고 가는 길에 찬미가 나올 수 있을까요? 찬송이 있을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26장 30절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요절입니다. 이사야 43장 21절에 의하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창조의 목적이 찬송이요. 당신의 백성을 구속, 구원하신 목적이 바로 찬미올시다. 찬송을 부르게 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목적이요, 역사의 방향입니다.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만들고 그렇게 섭리하고 경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사흘분의 설탕이에요”라는 제목의 아주 사랑스러운 산문집이 있습니다. 오인숙 씨가 지어놓은 조그만 책인데요, 이 속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친히 경험한 경험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어떤 날 장애인선교회에서 “행복나누기 찬양제”라고 하는 그런 찬양제를 열었는데 오인숙씨에게 초대장을 보내고 당신은 시인이니까 여기 와서 찬송을 같이 부르고 좋은 시를 하나 발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했는데 이 오인숙 여사께서 그날 따라 기분이 나질 않아요. 뭐 시상이 떠오를 것 같지도 않아요. 그래 마음이 좀 그렇게 편하지 않아서 못 가겠다고 거절을 했어요. 거절을 해 놓고 퇴근하는 길에 ‘그래도 그럴 수가 없지’ 마음에 좀 께름직해서 퇴근 후에 서초구민회관을 찾아가게 됩니다. 여기서 “행복나누기 찬양제”라고 하는 장애인들의 선교회 주체로 찬양제가 열리고 있는 겁니다. 그는 별 감동 없이, 어쩌면 거절한 것이 좀 미안해서 뒤늦게 참석을 했더랍니다. 그런데 복음성가 가수인 조성철씨의 찬양, 휠체어에 앉은 채로 기타를 치면서 복음성가를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 얼굴은 환하고 그 음성은 맑고, 그 가사 하나가 큰 감동을 주는데 이렇게 놀라운 행복한 시간이 있을 수가 없어요. 정말 행복을 나누어주는 축제가 되고 있더랍니다. 여기서 깊은 감명을 받으면서 그는 한없이 울었답니다. 그리고 이렇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자신이야말로 가장 무거운 중증 장애인이다. ‘저분들은 몸의 장애인이지만, 나는 마음의 장애인이다. 나는 정신적인 병자다’ 이렇게 스스로 깨닫고 펑펑 울었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난 눈은 아름다워지나 봅니다. 옆에 앉은 낯선 사람의 얼굴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고, 작은 일 사소한 일, 사물까지도 사랑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졌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찬송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잘되고, 성공하고, 축제를 하고, 축하하고, 축하파티… 거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이 깊이 내려가고, 내려가고, 겸손하고, 아주 순수해질 때, 거기서 진정한 찬송, 진정한 찬양을 부르게 되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활짝 웃으면서 감사하다고 해 보았습니까? 아니면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해 보았습니까? 눈물로 감사하는 그 세계에 진정한 행복과 감격이 있는 것이요.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찬미를 온전케 하신다고. ‘카텔티소’라고 하는 말은 ‘완전하다’는 말입니다. 부족한 부분을 하나님께서 완전케 하십니다. 찬미를 완전케 하십니다. 이렇게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시편 8편 2절을 인용한 내용입니다. 여러분 찬미가 어디 있습니까? 기쁨과 행복과 감사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건강한 때입니까, 병든 때입니까? 성공한 때입니까, 실패한 때입니까? 오늘 본문에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지금 입성하고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만세를 불렀습니다. 만세소리는 같지만 그 뜻은 다 다릅니다. 저마다의 생각을 가지고. 보세요. 많은 어른들은 예수님이 왕이 된다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보좌에 앉을 것이라고 출세욕에 들떠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만세, 만세 큰소리로 불렀습니다. 호산나를 불렀습니다만은 어린아이들은 아닙니다. 걔들은 출세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영광을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순수하게 호산나를 불렀습니다만은 그러나 역시 어린아이들은 깨달음이 유치했었다고 생각을 해야되겠지요. 어쨌든 찬송을 부릅니다. 이 어린이의 찬송을 이 순진한 찬송을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온전케 하신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시 감사와 찬송은 깊은 깨달음에서 오는 겁니다. 깨달음이 그 언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깨달음.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이 그의 일생과 같은 행적이 쭉 나타납니다만은 사도바울이 찬송을 불렀다는 얘기가 별로 없어요. 물론 불렀겠지만은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빌립보 감옥에서 불렀다고 그랬어요.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매를 맞고 죽을 지경이 되어서 아주 정신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리게 될 때 으시시하고 춥고 그랬겠지요만은 정신을 차리는 순간,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여기서 피어오르는 찬양, 아주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순수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비교적 찬송을 좋아하고 한때는, 하도 사람들이 없을 때는 성가대 지휘도 해보고 그랬습니다만은 그러나 제가 한평생 부른 찬송 중에 가장 깊은 눈물과 감사와 감격으로 불렀던 찬송은 북한에서 광산에서 시간을 알 수 없고 언제 죽을는지 모르는 그런 결정적인 시간에 얼마동안 고생을 하는 중에 광산에서 일을 하면서, 대체로 그분들이 기독교인들이 많아요. 절대로 말을 못하게 돼있어요. 말을 한마디만 했다가는 무슨 말이든 좌우간 곤욕을 치릅니다. 그런 가운데 일을 하면서 휘파람으로 찬송을 불러요. 한사람이 휘파람으로 찬송을 부르면 그 다음에 점점점점 전염이 되어서 많은 사람이 고거 따라서 휘파람을 부르는 사람은 다 교인이요. 어느 사이에 그 지역이 휘파람 찬송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 마주보면은 얼굴이 환하고 어떤 분은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흐릅니다. 이 같은 찬송, 그 순간의 찬송, 정말 사도바울이 감옥에서 찬송을 불렀다. 그 뜻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때 순수한, 온전한 찬송을 불러 보셨습니까? 깊이 깨달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너서 나옵니다. 홍해를 건넜을 때에 감격에 찬 기쁨에 그들은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 찬송이 오늘의 찬송가의 시조라고들 찬송가 학자들은 말을 합니다. 그랬을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서 출애굽된 그 감격, 노예생활에서 벗어난 자유인의 감격을 그저 찬양을 합니다. 앞에 무슨 일이 있을는지 알 바가 아닙니다. 이대로 구원받고 구속받은 그것만 가지고 충만합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찬양을 합니다.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양, 그것이 우리 찬송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 감사와 감격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 그 창조적인 역사에 대한 깨달음이 마침내 이 같은 찬양을 하게 하는 것이올시다.
폴 투르니에라고 하는 스위스의 심리학자이고, 의사인 그분의 책이 많이 나와있습니다만은, 창조적 고통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많은 환자들을, 특별히 정신과 환자들을 상담을 하고 한평생을 지냅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이렇다고 합니다. 현대 환자들의 중증은 바로 자기 상실감이다. 용기 부족이다. 어느 사이에 자기를 잃어버렸다 이거예요. 돈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명예를 잃어버린 게 아니고 건강을 잃은 게 아니라 자기를 잃어버렸어요. 자기 상실감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거죠.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는 거예요. 왜 자기를 잃어버렸느냐? 그것을 몰랐더라는 겁니다. 여러분, 고난이라는 것은 누구나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창조성을 알게 하고 나의 나됨을 되찾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줍니다. 잃어버린 자기를 찾게 하는 것이 고난입니다. 고난을 모르고 살다 죽는 사람은 멍청하게 가는 거예요. 가난과 고통을 통해서 나라고 하는 존재를 찾게 됩니다. 나의 당한 고통, 이것이 준 가장 소중한 선물이 바로 자기를 찾는 길이요, 하나님을 찾는 길이올시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단순하게 합니다. Simplify, 단순하게 할 때 거기서 순수한 찬송이 나오는 것이올시다.
아직도 여러분의 마음이 복잡합니까? 소원도 많고, 뭐 체면도 생각해보고, 뭐 가문도 생각하고, 뭐 나름대로 복잡, 아직도 복잡합니다. 아직도 덜 됐어요. 정말로 깊은 고난에 들어가게 됩니다. 실존적으로 부딪히게 될 때 마음은 깨끗하고 단순해집니다.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영원은 관조하게 됩니다. 그 순간에 찬송이 우러나는 것이올시다. 미래를 지향합니다. 약속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지난날의 과거가 하나님의 손에 있었고요, 오늘의 현재가 하나님의 은총에 있구요, 미래로 향하는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이 환하게 전망됩니다. 관조됩니다. 눈앞에 환하게 전개됩니다. 그때에 찬송이 우러나는 것이올시다. 여기서 생각합니다. 소망이 없는 행복은 행복이 아닙니다. 어떤 고난이라도 거기서 소망을 산출할 수 있을 때 거기에 찬송이 있고,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오직 소망이. 찬미의 주제는 언제나 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유치할 때는 내 소원을 이루어 주세요, 내 병을 고쳐주세요, 내 소원을 들어주세요, 이런 것이 찬송가 가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만은 이것을 다 넘어서게 될 때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오늘도 내 마음에 함께 계시는 성령의 역사를 은사를 찬양합니다. 그래서 트리니터리안(Trinitarian), 삼위일체적인 그런 찬양이 가장 높은 찬양이요, 제일 높은 찬송이 되는 것이올시다. 초대 교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유무상통을 했어요. 내 것을 내 것이라 하는 자가 없었어요. 서로 사랑하고 돕고 이렇게 공유했다고 합니다만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것이죠. 사도행전 2장 47절에 보시면 초대교회사람들은 모일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더라고 했어요. 경제적으로 나아진 것도 없어요. 정치적으로 달라진 것도 없어요. 자기 생활에 변화가 있는 게 아니요. 그러나 그들에게 달라진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원망과 불평과 좌절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그런 것으로 바꾸어졌어요. 여러분, 낮에도 별빛이 있답니다. 그러나 낮에는 별을 못 봅니다. 모든 빛이 사라지고 캄캄해졌을 때, 삼라만상 그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때에 비로소 저 멀리 멀리 있는 별빛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람은 밝을 때 멀리 보는 게 아니라 어두울 때 멀리 보는 것입니다. 찬송을 온전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순진하면서 잘 모르고 깨닫지 못할 때 알게 하시고, 나를 중심한 찬송을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한 찬송으로, 조건적인 감사를 무조건적인 감사로, 현재적인 이 답답한 인간을 영원지향적인 거룩한 심령으로 승화시켜 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조상들, 순교자들은 하나같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송이 없이 죽는 자는 순교자가 아닙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세상을 떠나면서 “‘참 아름다워라’ 이 찬송을 불러다오” 그래서 온 집안이 돌아가실 때 계속 ‘참 아름다워라’를 불렀대요. 장례식에서도 ‘참 아름다워라’만 불렀어요.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러나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김용식씨라고 아시는 분이 많을 겁니다. 전 장관으로 지내셨는데, 그분은 인애하신 구세주여, 죄인오라 하실 때 나를 불러주세요. 이 찬송을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김활란 박사님께서는 내 장례식에 장송곡을 부르지 마라. 축제와 같이 기쁜 찬송을 불러다오. 그래서 그의 장례식은 축제였습니다. 눈물이 없는 완전한 음악제로 그렇게 그렇게 장례식을 지냈습니다. 제가 잘 알고 존경하는 김정준 목사님은 “저 좋은 낙원 이르니 내 쾌락일세” 그 찬송을 불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향하여 겟세마네 동산을 올라가시면서 찬미를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찬미와 함께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환란을 이기고, 승리하여 찬송하기보다, 찬송하며 승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요. 특별히 임종시에 우리는 또다시 밝은 찬송을 부르며 주님 앞에 가게 됩니다. 이제 묻습니다. 당신의 찬송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임종시에 부르고 싶고 듣고싶은 마지막 찬송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부르는 찬송을, 이 찬미를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거기에 참 소망, 참 승리, 참 용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앞에 바라보시면서 제자들과 함께 찬미를 부르며 동산을 올라가셨던 주님을 생각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은혜주시사 잃어버린 찬송을 다시 찾게 하시고, 복잡해지고 정욕화되고, 세속화된 찬송을 다시 신령한 찬송으로 그 찬송을 온전케 하옵소서.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서 날마다 새로운 찬송을 부르며 주님을 향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