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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2001.08.05
제 목 :참 자녀됨의 속성
본 문 :히브리서 12 : 5 ∼ 13
저는 누구보다 더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고 늘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열일곱살까지는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너무나 엄했습니다. 때로는 많이 때려서 매도 많이 맞았습니다. 어떤 때는 불필요하게 생각되는 일을 내게 요구했습니다. 시골에서 새끼를 꼬기도 하고 가마니를 치기도 하고 짚신을 삼기도 하고……. 당장 가난한 것도 아닙니다. 이 새끼를 꼬아야 먹고 사는 게 아니고 또 이 가마니를 팔아서 무엇에 쓰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루에 여덟장씩 가마니를 쳐야했습니다. 많은 일을 시켰습니다. 가정은 비교적 넉넉했습니다. 어려워서 제게 일을 시킨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전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일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순종해야만 했습니다. 절대로 이의를 제기하면 안됩니다. 아침 일찍 일어난다고 해서 해야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농촌은 한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야만 했습니다. “어느 짐승이 늦게 일어나냐. 언제나 부지런한 새가 먹을 것도 있다. 사람은 일하고 살아야 한다. 공짜로 먹어서는 안된다.” 도대체 이게 이해가 안됐습니다. ‘왜 나에게 이렇게 필요 없는 일을 자꾸 시킬까?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할까?’ 그랬습니다. 언젠가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바로 옆방에서 주고받는 대화를 들었습니다. 엿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께 말씀드립니다. 그렇게 얘를 괴롭히냐고, 왜 자꾸 때리냐고,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그렇게 많은 일을 시키느냐? 당신 정말 아들을 사랑하는거냐, 하지 않는거냐 하고 물었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자식은 속으로 사랑하는 거지 겉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야. 세상에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이 말을 들으면서 비로소 열일곱살 때 처음으로 아버지 사랑을 느꼈습니다. ‘사랑하긴 하는가 보다.’ 그리고 제가 광산에 끌려가서 고생하다가 도망을 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산에 숨어있었습니다. 몇 달 동안. 그 삼엄한 경계를 뚫고 아버지께서 제게 식량을 조달해 주었습니다. 그 굴에까지 찾아와서 식량을 주고 돌아갑니다. 이거 발각되면 현장에서 총살당합니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제게 계속 식량을 가져다 주셨는데 아무 말씀도 없으십니다. 그리고 일어나면서 “몸조심 해라” 한마디하고 산을 내려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내가 무사히 집에 돌아가면 한평생 아버지께 효도를 다 할 것이라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는 아버지는 벌써 총살당하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랑을 미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불만이 많습니다. 그 사랑의 의미를 깨달을 때까지는 계속 불만입니다. 언젠가 한번 확증을 얻고서부터만이 그 다음의 일들이 다 납득이 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들 4형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삼형제는 항상 불만입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어떤 때 뭘 잘못하면 아주 연대 기합을 줘요. 아들을 모조리 세워놓고 때리는데 형님은 때리지를 않습니다. 형님은 때리지 않습니다. 삼형제만 때리고 맏형은 절대 때리지 않습니다. 이 삼형제가 늘 불평입니다. ‘어째서 우리집에는 셋만 때리고 맏형은 안때릴까?’ 얼마 후에 그 어머니로부터 그 비밀을 들었습니다. 그 아들은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니더라구요. 그 남편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첫 아이를 낳다가 부인이 죽었어요. 바로 그 때 이 처녀가 ‘내가 그 아이를 키우겠습니다’하고 들어와서 자기 자식을 셋을 낳았어요. 꼭같이 키우고 이건 비밀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아이들끼리는 전혀 모릅니다. 친형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나 이 어머니는 이상하게도 자기 아이는 마음대로 때려도 저 아이는 손을 댈 수가 없대요. 오늘 성경 말씀에 참 아들과 사생아을 말합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인’ 이라는 게 뭡니까? ‘예수를 믿는다’란 하나님의 자녀 됨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게 하고 아버지가 우리 하나님 아버지 되심을 알게 하고 믿게 하고 그로써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증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아버지가 될 때, 바로 내가 아들이 되고 내가 딸이 되는 것이올시다.
탕자가 집을 나갑니다. 아버지의 잔소리가 싫었고 간섭이 아주 괴로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가서 탕자가 되었습니다. 방황하다가 돌아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결코 탕자로 영접하지 않았고 사랑하는 아들로 영접합니다. 그 아들이 뒤늦게야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집을 나가지 말아야 할 것인데, 돌아왔으면 벌써 돌아왔어야 할 것인데,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 줄 알았다면 내가 왜 밖으로 방황해야 했던가?’ 많이 회개하고 뉘우쳤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참 아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자녀를 말할 때, 특별히 어린아이들을 말할 때 ‘테크나’라고 말합니다. ‘테크나’가 있고 ‘쿠이오스’가 있습니다. ‘테크나’란 일반적이요,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가르키는 말이구요, 철없는 아이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고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될 때 그런 정신적 차원에서 비로소 참 아들이 될 때 가서 ‘쿠이오스’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뜻입니다. 자, 이제 그 아버지가 자녀를 어떻게 대하는 것입니까? 오늘 성경말씀에는 아주 여러 가지로, 누누하게 특별히 헬라어 원문에 있어서 다섯가지 단어를 사용해서 그 아버지의 사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권한다’라고 했습니다. ‘파라칼레오’라고 하는 말입니다. ‘파라칼레오 파라칼레세오스’라고 하는 이 말은 흔히 우리가 말할 때 ‘위로한다’하는 말로 번역합니다. 위로한다. 어린 아이들, 철없는 아이들 잘못될 때 그걸 위로합다. 울고 있을 때 위로합니다. 괴로워 할 때 위로하고 달랩니다. 권유합니다. 유치하게 갈 때 부득불 그를 위로합니다.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랩니다. 이것이 ‘권한다’하는 뜻이구요 ‘파라칼레오’입니다.
두 번째 오늘 성경에 나타난 것은 ‘권면한다’ 하고 번역했는데 ‘권면’이라고 번역했지만 ‘디아레게타’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영어로 번역하면 Discuss입니다. 이것은 이성에 호소하며 이치를 들어가며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봐라. 이렇지 않느냐? 네 생각엔 어떠냐? 네 스스로 판단하라’하고 이성에 호소하며 설득을 하고 논리적으로 가르칩니다. 이건 상당한 높은 수준의 사랑입니다.
그 다음에는 꾸지람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건 ‘엘렌코메네오스’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꾸짖다’하는 말입니다. 일방적입니다. 여기 강한 의지가 있어서 일방적으로 ‘너는 잘못 됐다’하고 판단합니다. ‘지금 이것, 이것이 잘못되고 있다. 너는 지금 잘못 가고 있다.’ 확실하게 심판을 합니다. 확실하게 알도록 꾸짖습니다.
네 번째는 징계합니다. ‘파이데이아스’라고 하는 이 말의 뜻은 영어로는 Discipline이라고 번역합니다. ‘훈련’이올시다. 아버지의 뜻이 있어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도록,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오도록 효과적으로 훈련을 하십니다. 거기에 도달하도록 훈련 하십니다. 약한 자를 강하게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미련한 자를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비상 조치를 사용합니다. 훈련하십니다.
옛날 유명한 신학자요 철학자였던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을 섬기라고 내게 건강을 주셨지만 나는 세상을 위해서 다 써버렸습니다. 이제 저를 일깨워 주시려고 저희에게 병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며 진심으로 회개합니다. 내 힘으로 못 고치는 것을 고칠 수 있도록, 내 힘으로 떠나지 못하는 것을 떠날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도록 권고 하심을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여러분 상처 없이 사람 되는 거 봤습니까? 뼈아픈 경험이 없이 예수 믿는 사람 봤습니까? 매 맞지 않고 사람되는 거 보았습니까? 많은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그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 자녀를 훈련하시는 것이올시다. 역사 속에 의미가 있고 훈련 속에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이 게시되어 있는 것이올시다. 내가 못하는 것, 하도록,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 깨닫도록, 강하게 역사합니다. 그리고 정 빗나갈 때 채찍질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도 ‘채찍질하신다.’ ‘마스티고이’라고 하는 말은 체벌을 말하는 것입니다. 체벌 속에 말씀이 있습니다. 고난 속에 계시가 있습니다. 강권하시는 교육이 있는 것이올시다.
이 다섯가지를 종합하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징계, 그 속에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의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양보할 수 없는 확실한 하나님의 의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 있어요. 꼭 그러해야겠어요. 그런 사람을 만들어야겠어요. 다만 그 속에 엄청난 사랑이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진노적 사랑, 공의로운 사랑, 나아가서 창조적 사랑이라고 합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창조하십니다. 창조적 사랑, 그리고 그 속에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생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가 속에 있습니다.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사랑이요, 사랑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이건 행동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랑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되는가?’하는 것이올시다. 이 진노적 사랑에 대해서, 이 공의로운 사랑에 대하여, 이 창조적 사랑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먼저는 내가 자녀됨을 믿어야 됩니다. 그가 내 아버지 됨을 믿고, 내가 자녀 됨을 믿어야 합니다. 매를 맞아도 ‘내가 사생아인가 보다’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나의 아버지요 나는 그의 아들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다. 이 엄연한 신앙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이 모든 일은 사랑 때문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병도 주시고 사랑하기 때문에 실패도 주시고 사랑하기 때문에 성공도 주시고, 올려주시던 내려주시든 살려주시던 죽이던, 어떤 경우에도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내가 당하는 현실은 다 유익한 것입니다. 내게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육체의 가시도 어떤 고난도 다 필요해서 내게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리고 당연한 일로 수용해야 됩니다.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여러분, 여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내게 어떻게 대하든지 지금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상식에 어긋납니다. 나의 이전 경험과 상반되기도 합니다. 나의 느낌과 감정, 나의 안전과 나의 필요, 나의 명예 나의 기분은 영영 고려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나의 자존심은 짓밟아 버리는 것 같아요. 그런 아픔이 있습니다. 나를 바보처럼 실패자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도 아버지에게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는 내가 생각하는 방법과 다르기 때문에 못마땅합니다. 아버지가 정한 시간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 무엇인지 그 정도를 다 알고 있습니다. 정도에 맞도록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장 귀중한 예가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땅과 아들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100세가 될 때까지 아들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너무도 기다리기 힘들었습니다. 100세에 아들을 주었습니다. 이제 그 아들이 좀 커서 장가보낼만큼 되었는데 바로 그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아들을 내게 바쳐라. 모리아산에 가서 제물로 바쳐라.” 이거야말로 벼락같은 말씀이올시다. 의심이 많습니다. 저 아들을 통하여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자식을 주신다고 했는데, 이제 그 아들 장가보내기도 전에 왜 내 놓으라는 겁니까? 게다가 자식을 죽이는 살인을 하라는 것입니까? 아들을 죽여 불태워버리라는 겁니까? 도대체 이해가 안됩니다 이게. 그러나 아들된 아브라함은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사흘길을 갑니다. 사흘길을 가는 동안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산에 올라갈 때 장작 나무를 가지고 갑니다. 불도 들고 갑니다. 아들이 말합니다. “아버지, 나무도 있고 불도 있는데 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브라함의 가슴이 찢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실 것이다. 가자.” 모리아 산에서 27살로 추정됩니다. 이 아들을 설득을 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 아마 보통 아들 같으면 ‘아버지가 100세가 넘더니 노망을 했나?’ 그럴 리가 없다 이거예요. 이치에도 맞지 않고. 그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순종합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그것이 아버지가 하나님께부터 들은 음성이라면 그리 하세요.” 제물에, 재단에 오릅니다. 이 아들을 생각해 보세요. 바로 이 순간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말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네 후손 가운데서 메시아가 태어나리라.” 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 아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을 했고, 이삭은 아버지께 순종을 했습니다. 깨끗하게 순종했습니다. 이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후에, 이렇게 순종한 후에 의의 평강한 열매로 더해 주신다. 순종부터 먼저 하고, 먼 훗날에 가서 비로소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이 그 이삭을 다시 데리고 산에서 내려올 때 그 감격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랬겠지요. ‘이럴 줄 알았으면 벌벌 떨지 말걸, 슬퍼하지도 말걸……’ 그랬겠지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된 모습을 보십시다. 그는 열두살 때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 이야기도 했구요 십자가가 눈앞에 있을 때 요한복음 18장 11절에서 말씀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이것이 예수님의 신앙입니다. 십자가를 지실 때에 누가복음 23장에 보면은 “아버지여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리고 눈을 감습니다. 이것이 아들 예수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 가운데 삽니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그의 자녀 올시다. 우리는 아버지의 말도 때로 이해가 안됩니다. 그래서 순종하기가 어렵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를 어찌 우리가 다 헤아리겠습니까? 아버지의 말도 일단 순종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아버지의 역사는 더더욱 믿고 순종해야 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 ‘성령은 항상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증해 주십니다. 유명한 ‘메디슨’이라고 하는 분의 기도문이 있어서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는 나의 가시에 대하여 결코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나의 장미꽃에 대해서는 수천번 감사하였습니다만
주님이 나에게 지워준 십자가에 대해서는 한번도 감사하다고 생각해본 일이 없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나의 인생의 항로를 완성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시여,
이제 저에게 이 가시의 가치를 가르쳐 주옵소서.
그리하시면 나의 눈물이 무지개 됨을 알겠나이다.
그리고 나서 나에게 고난 당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 사랑을 믿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믿으면서도 종종 우리 뜻에 합당치 않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원망도 하고 불평도 하고 거역도 합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말씀으로 성령으로 감화하사 내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알게 하시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징계가 있었고 채찍이 있었고 강한 훈계와 위로도 있었음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인하면서 확실하게 밝은 아름다운 미래를 향하여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