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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자유인의 윤리

신명기 24: 17 ~ 22

곽선희 목사

2003.08.10

날 짜 :2003.08.10
제 목 :참 자유인의 윤리
본 문 :신명기 24 : 17 – 22절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설교 중에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동서독이 나뉘어 있을 때 동독의 개한마리가
베를린 장벽을 넘어서 서독으로 왔습니다. 사람들은 이 개를 붙들고 물어보았습니다. 왜 왔냐고? 먹을 것을 안주더냐?
주더라고! 잠자리가 없더냐? 주더라고! 근데 왜왔냐? 그러니깐, 동독 개가 하는 말이 동독에서는 마음대로 짓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왔습니다. 자유는 소중한 것입니다. 유명한 과학자 아인슈타인 박사가 아주 뜻깊은 말씀을 남겼습
니다. 인간의 참된 가치라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해방될 수 있는가? 라고 하는 것 과 또는
그 자기 자신이 얻은 해방의 의미가 무엇인가? 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부자라고 그가 결코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권력을 얻었다고 그가 성공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가 얼마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한가? 그 자유의 그 영역 만
큼에 사람은 행복을 누리기 마련이에요. 또 그 해방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가? 그것이 그 사람의
삶의 가치요, 성공의 기준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참 자유의 뜻을 모르면 벌써 그는 자유인이 아니요, 노예입니다. 그
가치를 알 때, 비로소 그가 참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노예 상태와 노예성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노예 상태에서는 벗어났어요. 그런데 노예성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어요. 그러면 이 사람은 자유
인이 아닙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리적, 정치적, 경제적 자유만 주어졌다고 자유가 아니에요. 문제는 자유성!
이게 문제예요, 노예성이 문제예요. 여전히 노예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어디에 있던지 아직도 노예란 말입니
다.
교육학자인 헤르바르트의 아주 깊은 뜻을 담은 말씀이 있습니다. 인간이 추구해야할 윤리적 이상, 이상적 인간상, 참
자유인으로서의 길이란 어디 있느냐 – 아주 확실하게, 아주 결정적으로 말씀을 합니다. 첫째가 ‘내면적 자유이념.’ 이라
는 거예요. 외적인 것이 아니고 내면적인거지요. 그가 내면적 자유를 얼마나 누리느냐 하는 것이에요. 정신적, 특별히
양심적 그리고 신앙적인 자유 말입니다. 어떤 환경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내면적 자유가 없는 사람은 결
코 자유인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완전성의 이념’ 이라 하는 말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절대 선을 추구해야 돼요. 이
자유란 절대적인 것이어야 되요. 이렇게 하면 없어지고 저렇게 하면 생기고? 이거 아니에요. 가난하든, 부자든, 건강하
든, 병들든 그의 심령은 항상 자유로워요. 화목에 있어도 그 양심은 자유로워요. 이런 절대선, 그것에 마음을 두어야 비
로소 자유인이다. 또 하나는 ‘호의적 이념’ 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희생을 통해서 비로소 자유인이 된다는 걸
잊지 말아야 되요. 보세요, 받으면 노예예요. 주면 자유인이에요. 신세지면 벌써 그만큼 노예가 되는 거예요. 메이는 거
예요. 오히려 남에게 베풀고 살면 많이 베풀고 살면 그만큼 그는 자유인이에요. 우리는 누구의 사랑을 못 받는다고 이
렇게 불만하고 있지만은 그거 받으면 벌써 나는 거기에 메이는 거예요. 나는 호의적으로 베풀면서 많이 자유인이 된
다……. 이 얼마나 깊은 뜻 가진 말씀입니까? 또 하나는 ‘정의의 이념’ 을 말합니다. 자유는 정의에 기초한다는 거죠. 결
코 방종일수가 없어요. 정의가 있고야 그 위에 자유가 있는 것이죠. 또한 ‘보상적 의미’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함께 합니다. 나의 자유로운 행위에 내가 책임을 져야 돼! 나는 방종하고 책임을 다른 사람이 질수는
없는 거예요. 내 행동에 내 책임을 질때 비로소 자유인이다. 책 한 권 속에서 헤르바르트는 이런 귀한 말씀들을 아주 누
누하게 논리적으로 설명 해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출애굽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애굽에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여러분, 출애굽이란? 해방 사건입니
다. EXODUS – 해방사건! 아마도 해방사건 치고는 출애굽 사건처럼 드라마틱하고 굉장한 이런 역사에 다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8.15를 기념합니다만은 우리는 36년동안 일본 사람들 손에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해방이 됐다고 하는데
출애굽 사람들은 400년동안! 그것도 노예로 노예생활 400년,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로 죽어가는 사람들이에요. 이 사
람들이 자유를 얻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할 수가 없어요. 오직 하나님의 큰 능력과 이적과 기사로써 모세를 보내서 하
나님의 능력으로 속량해서 많은 값을 치루고 속량해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
서 정치적으로 물리적으로 자유를 얻었는데. 이 사람들이 자유인이 됐느냐? 하는 것이죠. 자유를 얻었으나 자유인이
아니요, 해방은 됐으나 그들의 생활 풍습과 그들의 사상과 그들의 믿음, 그들의 사람됨이 여전히 노예였다 하는 말입
니다. 나는 출애굽기를 읽을 때마다 가끔 가다가 읽으면서 화가 날때가 있어요. 그거 왜 그러냐 하면 이 사람들 애굽에
서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러면 좀 고생이 되더라도 노예로 살다가 죽느니 보다 자유인으로 광야
에서 죽어도 우리는 행복한거지 이렇게 생각해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조금 어려운 일이 있으면 애굽으로 돌아가
자! 말이나 되는 일 입니까? 어떻게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합니까? 모세를 때려죽이고 가겠답니다. 이 사람들이
아주 못됐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욕을 했지…… 나쁜 놈들이라고요. 근데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만 나쁘질 않더라고요.
그때마다 확 떠오르는게 있어요. 제가 젊었을 때입니다마는, 8.15 해방 후에 혼란했어요. 토지 개혁이니 뭐니 해서 아
주 어려웠어요. 경제, 정치적으로 아주 어려워…… 어른들이 모여가지고 얘기하는걸 가만히 들으니까 너무 쉽게 그 말
을 하는 거예요. “왜정때가 낫지, 8.15 해방 전이 훨씬 나았어.” 이러더라고요. 그 말이나 되는 겁니까? 어떻게 8.15 해
방 전이 낫다고 말을 합니까? 그거 꼭 같은 얘기이거든요. 여러분, 자유! 자유가 좋은 거예요. 이대로 죽어도 자유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이렇게 외쳤는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근데 생각을 해봅니다. 성경말씀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종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참 묘한 말씀이에요. 과거에 매이지 마라! 그러나 과거를 잊
지 마라! 과거에 매이지 마라. 노예성에 매이지 말것이고, 그런가 하면 과거를 잊지 마라! 너희가 종이 되었던 것. 비참
하던 것. 잊지 마라! 사람들이 건망증이 많아서요, 지나간 옛날 얘기들은 나쁜 것들은 잊어버리고 좋았던 것만 기억하
더라고…… 그래서는 ‘그때가 좋았지’ 그러더라고요. 이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에서
과거를 생각하며 과거로 돌아가면서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광야에서 많은 사람이 엎드려
져 죽었어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것을 아주 총칭해서 집약해서 말씀하기를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지
은 죄는 원망죄다” 그랬어요. 오로지 원망죄! 여러분, 원망하는 한 나는 노예입니다. 감사하면 나는 자유인입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노예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오로지 감사뿐이야…….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조금한 일에도 원
망과 불평이 있으면 그는 아직도 노예입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아주 귀중하게 우리에
게 설명해주십니다. 노예성이라니 뭘까? 죄와 타락과 강팍함과 원망과 불평들 이런 것들인데…… 이 불신앙. 왜 아직
도 거기에 매어 있는가?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씀하기를……. 너희가 종이 되었던 때를 기억하라!
그러시면서 전혀 다른 맥락같은 귀중한 말씀을 주십니다. 너희가 농사를 하고 추수 할 때, 그 보릿단을 가져오다가 몇
개를 놔두고 왔다고 하자! 그거까지 다 가져오려고 하지마라.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 고아들, 과부들, 이런 사람들 가져
다 먹도록 남겨 두어라. 즉, 가난한 사람을 기억하라. 그 말이에요. 생각하라 이거예요. 너희가 포도를 딸 때, 아주 그냥
깨끗하게 따지 말고 포도열매를 딸 때 대충 따고, 좀 남겨라,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 가져가도록 하라! 그리하면 하나님
께서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제가 지금 말씀하시는 대로 맥락을 바꾸어 말하면 참 자유인이 되리라! 그런 말씀이에요.
이 깊은 뜻을 아시겠습니까? 제가 이 말씀을 지금 설명하지만 ‘어떻게 이 귀한 말씀을 설명을 드릴까?’ 고민이에요. 이
렇게 예를 들어볼께요. 우리나라에 고질적인 문제가 있죠. 그게 바로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예요. 그렇지요? 그래서
이 고부간의 관계는 풀리지 않는 끝까지의 문제라고요. 그런데 대체로 이런 말을 하더만요. 어려운 시집살이를 한 시
어머니가 며느리도 어려운 시집살이를 시킨다 그래요, 자기 시어머니로부터 어렵게 어렵게 고생을 한사람은 이름을
자기 며느리에게다가 씌워 가지고 며느리한테 말끝마다 “나는 이랬다. 나는 이렇게 고생했다.” 하면서 들볶는 거예요.
자! 이제 하고 싶은 말은 그리하면 그 시어머니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오늘 본문의 말씀은
‘나는 내 시어머니한테 이런 고생을 했느니라. 그건 고로 나는 네게 말하지 않는다.’ 그 말이 간섭하는게 싫었느니라.
그러하면 간섭하지 않겠노라! 그릇을 깼느냐? 깰수도 있지? 새거 사면 되지. 잘못했습니다…… 괜찮다! 너그럽게 하겠
노라! 내가 왜? 너무 당할 때 괴로워했으니까. 나는 이렇게 하겠노라. 그런 말이에요. 예전일 이지만 저의 아버지가 잔
소리가 많았어요. 꾸중을 많이 듣고 매도 많이 맞았지요. 그런데 뭐 돈을 여기다 넣어라! 저기다 넣어라! 뭐 얼마나 잔
소리가 많은지∼ 그랬는데, 그래서 저는 그게 싫었어요. 전 또 아이들을 키울 때 그냥 놔두었어요. 그래서 집사람이 좀
꾸중을 하라고 그래도 ‘아니야∼’ 좀 세수 안한다고 세수 하라고 막 그래요. “옛날 나도 하기 싫었어. 내버려 둬라.” 그
렇게 키웠어요. 글쎄 잘하는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나는 그 엄한 말씀이 너무 싫었어요. 그면 내가 또 엄하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그 엄한 가운데서 내가 노예성을 받은 거예요. 그냥 이어가는 것이거든요, 이건 자유인이 아
니에요. 그러지 말아야 돼요. 그럼 고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윤리에 대
해서 말씀합니다. “도둑질 했던 사람이 있느냐? 물론 다시 도둑질 하지 말 것이며” 그 다음 말이 중요해요. “돌이켜 빈
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그랬어요. 자! 도둑질 하던 사람은 이제 일
하라! 구제하라! 그래야 자유인이 된다. 아시겠습니까? 내가 누구한테 미움 받았다고 내가 미워하면 나는 노예성을 떠
나지 못한 거예요. 미움 받고 사랑하고 비판받고 칭찬하고 이게 자유인이에요. 이게 온전한 자유인이에요. 우리 교회
에 이름을 대서 죄송합니다만 류태영 장로님! 옛날에 고학할 때, 고생한 얘기를 가끔 해요. 저도 만나면 저도 고학해서
둘이 옛날 지나간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참, 어려운 고생했어요. 정말 중.고들학교 때 구두닦이 하면서 많은 고생
했어요. 그럼 어떻하면 좋겠습니까? 내가 고생을 했으니까 자식들에게도 “이놈아! 고생해야지. 이놈아! 장학금이 어디
있어? 니가 돈벌어서 공부해!” 그러겠습니까? 그런건 아니죠. 류태영 장로님, 지금 뭘 하느냐? 장학금 달라고 그러더라
고요. 장학재단 만들겠다고. 돈도 없는 사람이 구론고 만들어 보겠다고, 저도 얼마 드렸어요. 근데 내가 공부하느라고
어려웠노라! 그런고로 나는 고생하는 아이들에게 다소라도 주고 싶다. 이게 자유인이에요. 내가 어려움 당했다고 남을
괴롭히겠어요? 나와 같아야 된다고 하겠어요? 그건 아닙니다. 참 자유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매튜 팍스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가 쓴 “A Spirituality Named Compassion”라고 하는 책에서 현대인이 말이죠, 스
스로 삶의 의미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요소가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해요. 굳은 마음, 강팍한 마음! 남의 말을 듣지 않아!
자기라고 하는 감옥 속에 빠져서 동굴 속에 들어가서 편견에 빠져서 자기가 이렇게 비참한 노예가 되고 있는걸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게 인간이 현대인이 잘못 사는 거예요. 또 하나는 자기 사랑에 집착하고 있다는 거죠, 내가 나를 사랑한
다고 사랑하는 것이 됩니까? 이웃을 사랑하고야 나를 사랑하게 되는 거예요. 남을 행복하게 하고야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어요. 여러분, 잘났건, 못났건 마누라의 얼굴에 웃음을 주고야 나도 좋은 거 아닙니까? 남의 눈에 눈물을 나게 하
면서 나는 행복하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거는 망상이지요. 그런고로 자기 사랑에 집착할 때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된다.
또 무감각하다는 거죠. 기쁜 일도 없고 슬픈 일도 없어요. 너무나 무감각한…… 이게 바로 문제다. 너무 의식이 없는 생
을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가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너희가 자유인이겠느냐? 자유했느냐?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
라! 이 성경을 읽을 때 기왕이면 많이 추수 해 가지고 얼마를 나누어 줘라, 절반을 줘라, 그랬으면 좋겠는데 성경은 그
렇지가 않아요. 이 어떤 말씀이겠어요? 최소한도 요만큼이라도 가난한 사람을 기억하라! 보리를 벨 때, 이삭을 남겨라!
포도를 딸 때, 깨끗이 따지 마라! 그 만큼이라도 자비한 마음을 가질 때 너는 자유인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네 가정에
복을 주리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우리는 다시 주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여러분, 제발 다시 비
참한 노예가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노예성을 버려야겠습니다. 노예성으로부터 자유해야 했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
께서 그 민족, 그 가정에 복을 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자유를 모르는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자유를 지키지 못하는 자에게도 다시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여러모로 노예성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자유함을 깨닫지도 못하는 부자유속
에 살아가고 있음을 용서 하옵소서. 마음을 활짝 열어서 내가 옛날에 노예 되었던 것을 생각하게 하시고 또한 하나님
의 능력으로 해방을 맞은 것을 잊지 않게 하사 이 거룩한 자유를 사랑으로 지키며 은혜로 지키며 긍휼을 베풀며 지켜
나가게 하사 참 자유의 사람이 되어 참 자유의 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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