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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창세기 18: 22 ~ 33

곽선희 목사

2003.03.09

날 짜 :2003.03.09
제 목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본 문 :창세기 18 : 22 ∼ 33

영국 소설가 H.G.웰즈가 쓴 [대주교의 죽음]이라고 하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간단히 말하여 이런것입니다. 한 대주교가 시간을 정하고 하루에 세 번씩 대성전에 들어가 두손을 높이 들고 “오,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여,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옵소서”하고 교회를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도 기도를 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하나님께서 큰소리로 응답해주십니다. “오냐. 내가 예 있느니라. 무엇을 원하느냐?” 대주교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내 기도를 듣고 계셨구나!’ 그는 신음하듯이 중얼거리다 말고 벌렁 나자빠져 죽었습니다. 심장마비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 내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들어주십시오, 하고 평생토록 기도했는데 정작 하나님께서 들으신다 하니 그만 죽고 만 것입니다. 이 작품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단편소설로 유명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나는 생생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을 자세히 읽어내려가면서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지금 얼마나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여섯 번을 번복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저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니다” 합니다. 이번 한 번만 구하나이다- 계속, 두렵고 떨리는 중에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그 경건한 기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로 이미 작정하셨습니다. 작정하신 것을 놓고 그 뜻을 돌이키려 할 때 이렇게 이렇게 그는 두려워하는 가운데 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마지막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찾고 계십니다. 의인 열 명만 있으면 이미 심판하리라고 결정한 소돔과 고모라이지마는 그 열 명을 인하여 이 성을 사하리라, 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헤어질 때 높은 데 올라가 롯을 보고 그 삼촌 되는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롯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롯은 사방을 휘둘러보고 아름다운 땅 ‘요단 온 들’을 택했습니다. 그 땅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렇게 아름다운 땅, 풍요의 땅, 넉넉한 땅, 평화의 땅, 번영의 땅을 롯은 찾았습니다. 선택했습니다. 물질은 풍부했습니다. 전쟁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자유로웠습니다. 넉넉함을 즐겼습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죄가 있었습니다. 독일작가 헤르만 헤세는 인간에게 세 가지 강한 유혹이 있어서 인간은 이것을 물리치지 못하고 죄를 짓고 산다고 개탄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거친 육체의 욕망입니다. 불같은 육체의 욕망이 사람의 양심을 흐리게 합니다. 끝없는 욕심, 끝없는 욕망, 이것을 물리치지 못해서 사람들은 훤히 망하는 줄 알면서도 죄를 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저 잘났다고 하는 교만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 정신적인 악이있습니다. 이 악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참 우스운 얘기입니다마는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 하루는 교회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데 술이 거나하게 취한 지게꾼 하나가 행길에서 갈짓자걸음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종일 지게를 져서 돈 몇푼 벌고 그걸로 막걸리 몇잔 걸친 모양, 취해서 비틀거리며 소리를 지르는데 가까이 가서 뭐라고 소리를 지르나 들어본즉 간단했습니다. “이놈들아, 내가 누군지 아느냐.” 교만한 것입니다. ‘내가 비록 지게를 지고 산다마는…’ 마음속에 모든 사람을 다 우습게 보는 교만이 있었습니다. “이놈들, 내가 누군 줄 알고!” 소리소리 지르는 것을 보고 뒤따라가면서 한마디 했습니다. “지게꾼이지요 뭐” 여러분, 사람들이 말 안하고 참고 지내는 것 같아도 모두의 마음속에 엄청난 교만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번민이 있습니까? 미안하지마는 교만을 빼버리면 아무런 번민도 없습니다. 아무 고민도 없습니다. 아직도 고만합니다. 나 잘났다는, 변변찮은 교만이 있어서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 때문에 원치 않으면서도 계속 죄를 짓고 살아가야 합니다. 회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겸손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교만한 사람은 겸손할 수가 없습니다. 겸손해야겠다고 결심하면서도 겸손할 수 없습니다. 결국은 교만의 노예가 되어서 그렇게 비참하게 그렇게 그 많은 세월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졸렬하고 불손한 이기심입니다. 이기적인 마음입니다. 닥터 브라운이라고 하는 시카고 대학 교수가 한번 한국에 와 20세기에 21세기를 향한 가정문제에 대한 특별강연을 할 때 제가 마침 참석해서 들어보았습니다. 그분의 책도 읽어보았습니다. 가정문제, 제일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근본은 가정문제다, 그런데 가정이 왜 어려워졌느냐? 한마디로 이기주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기주의를 버리지 못합니다. 남을 위해서 희생할 마음도 없습니다.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니 남편도 없습니다. 아내도 없습니다. 요새는 자식도 없습니다. 나밖에 모릅니다. 오로지 나입니다. 이것을 깨드리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것이 안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부터 안되는 것입니다. 멀쩡히 함께는 삽니다. 그것밖에 안됩니다. 가족이 동숙자일 뿐입니다. 헌신이 없는 것입니다. 이기심입니다. 끝없는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서 가정이 파탄나고 세계가 이렇게 어려워진다고 역설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 그런 강연을 들어보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면 소돔과 고로라는 죄로 인해서 망했습니다. 죄중에서도 특별히 성적인 죄입니다. 이것은 도둑질이냐, 살인이냐, 하는 류가 아닙니다. 더러운 성행위로 인한 죄, 그런 것입니다. 제가 말씀을 미리 다 못드립니다. 집에 가셔서 영어사전을 한번 찾아보십시오. Sodomite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Sodomite-소돔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에 설명이 붙습니다. 남색, homo sex, 비정상적인 더러운 행위, 동물만도 못한 그 행위입니다. 한때 에이즈문제가 복잡해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마는 좀 알아두어야 할 것 같아서 큰 글자로 [AIDS]라고 써 있는 책을 사서 대충 읽어보았습니다. 후천성면역결핍증이라고 하는 이 AIDS병에 대해서는 그 설명의 서두가 이렇습니다. ‘가장 예방하기 쉬운병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병이다’ 참 맹랑한 소리입니다. 세상에, 예방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살면 그런 문제는 없는 것입니다. 그 더러운 행위들이 결국은 세상을 썩게 만듭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에이즈 환자가 수천명에 이릅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그래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 문제가 아니다, 가만 내버려두어도 썩어서 망한다.’ 세상은 그리로 가고 있습니다. 썩어문드러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Sodomite-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고 게십니다. 폴 틸리히라고 하는 신학자는 인간에게 불안이 문제인데 불안에 삼대요소가 있다, 하였습니다. 죽음과 생명에 대한 불안, 공허와 허무에 대한 불안, 죄책감에 대한 불안이 그것들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 불안이 더 큰 죄를 범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 불안이 더 큰 죄를 범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더 포악하게 만들고, 더 더럽게 만들고, 그렇습니다. 에이즈에 걸린 사람, 그 사람, 이제는 그저 “복수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인류에 복수하는 마음으로, 라고요… 거침없습니다. 여기에 걸려들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에이즈에 걸려나가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떤 마을은 분명히 있던 마을인데 몇 달 후에 가보니 없어졌습니다. 다 죽어버렸습니다. 온 동네가 다 에이즈에 걸렸다가 말라리아나 감기같은 작은 병 하나라도 걸렸다하면 이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일시에 온 마을이 다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을 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나라나 어느 사회나 어느 개인이나 망할 떄는 반드시 죄로 인해서 망합니다. 경제 때문에 망하는 것도, 정치 때문에 망하는 것도, 아니 전쟁으로 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전쟁으로 망하는 바로 그 뒤에 죄로 인해서 망한다 –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잠언 14장 34절에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하였습니다. 죄로 인해서 망합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좀더 깊이 들어가서 죄로 인해서 망하는 것이지마는 실제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의인이 없어서 망하는 것입니다. 기왕에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이 관영하여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 의인을 찾고 계십니다. 단10명, 의인 10명만 있었더라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로 인하여 이 성은 사하심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인이 없어서 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영국의 경제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A Study of History]의 결론을 내립니다.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관계다. 새로운 도전을 받을 때 어떻게 응전하느냐에 따라서 성패가 좌우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역사란 minority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 한 것입니다. 역사의 운명은 minority에 달려 있다, 했습니다. dominant minority, 지배적 소수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정치인 몇사람 잘못만나면 온 민족이 고생합니다. 그릇된 정치인 몇몇 때문에 온민족에 망조가 듭니다. 정치인 몇사람, 참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런가하면 creative minority, 창조적 소수, 이것은 정신문화적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creative minority에 의해서 나라와 개개인, 사회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성경은 의인을 묻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좋은 환경에서 좋은 사람이 나오는 것으로 알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 있고야 좋은 환경이 있는 것입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정치, 경제, 문화… 이거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도덕성이고, 그 속에는 깊은 죄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 – 사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인간을 찾으십니다. 아시는대로 아브라함은 그리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은 아닙니다마는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의로 여기시고(롬4:3) – 외롭다 하셨습니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입니다. 의롭다 하셔서 의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대화할 만큼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그럴 인정하셨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이 아브라함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지극히 사랑하셨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최소한의 의인이 소돔에 있어야 했습니다. 저는 이런 짓궂은 생각을 해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소돔 한가운데 살았더면 어떻게 되었을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롯이 아닌 아브라함이 소돔에 살았더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보시고 소돔을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분명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5장1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의 멸망을 앞두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왕래하며…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이렇게 안타까운, 하나님의 가슴아픈 절규가 여기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에 있었더라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보시고 소돔의 죄를 사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시원치 않은 롯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의가 없었습니다. 믿음도 없었습니다. 창세기 19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롯을 위하여 기도함으로 아브라함을 인하여 롯을 구원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인 일만 명보다 의인 하나가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보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죄인과 의인을 함께 멸하심이 합당치 않나이다,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죄가 많아도 그 속에 있는 의인을 함께 멸하시지 않습니다. 창세기 6장을 보면 노아 홍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앞의 5장에 보면 에녹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승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녹을 옮겨놓으셨습니다. 에녹 없는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신 것입니다. 에녹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도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에족 말입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큰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백성이 황금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내가 진멸하리라. 그리고 너와 네 후손을 번창케 해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모세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는 이렇게 아룁니다. ‘정히 이 백성을 진멸하시려거든 당신의 기록하신 생명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 제가 조금 해석을 하겠습니다. ‘정말 이 백성을 멸하실 것이면 나도 이 백성과 함께 죽으렵니다.’ 목숨을 걸고 중보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노를 거두겠다고요.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에는 이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런 의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꼐서 찾으시는 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성은 망한 것입니다.
여러분, 더러 세상을 탓하십니까?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전쟁위협에 시달립니까? 죄 없이 망하지 않습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지막관심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의 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새벽기도에 나올 때마다 우리 교인이 많이 나온 것을 보고 감사하면서 늘 이런 기도를 하곤 합니다. ‘하나님, 이 강남은 죄악의 도성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기도하러 나오신 이 분들을 보시고 하니님이여, 이 성을 사하시옵소서.’ 남편이 마음에 안듭니까? 좋은 아내만 되십시오. 아내가 마음에 안듭니까? 남편된 구실만 제대로 하십시오. 자녀가 문제입니까? 잊어버립시다. 나만 하나님 앞에 똑바로 서면 자녀교육은 저절로 됩니다. 문제가 없습니다. 가장 절실한 말씀입니다. 세상 변화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치가 어떻고 전쟁이 어떻고 – 잠깐 잊어버립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서 아브라함처럼 기도할 것입니다. 내가 먼저 그 열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의인처럼 바로 서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을 사하실 것입니다. 잘 아시는대로 애굽의 보디발이라고 하는 사람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요셉이 그 집에 있음으로해서 요셉을 말미암아 그 집에 은혜를 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라반도 우상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집에 야곱이라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인하여 그 집에 복을 내리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 하나가 여기에 있음으로해서 하나님께서 이곳에 복을 내리실 수 있도록 그러한 사람, 그런 ,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조용히 옷깃을 여며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비관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나 하나가 아브라함같은, 모세같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중보적인 기도를 들으시고 이땅에 평화를 더하실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죄없이 망한 백성이 없습니다. 죄없이 심판과 전쟁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늘 알면서도 우리는 전쟁 자체를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바로 서고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의인 열 명이, 그 열 명중의 하나가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막고 전쟁을 멈추고 주의 평화를 얻어낼 수 잇는 주님의 귀한 사람들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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