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구독

ic_info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ic_info

다르게 보기

누가복음 19: 1 ~ 10

김경진 목사

2019.07.28

< 관점을 달리하면 다르게 보입니다. >

제주도에 가면 ‘생각하는 정원’이라는 분재정원이 있습니다. 저도 오래전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유명한 분들도 많이 다녀가셨고 합니다. 그 정원에 150년 정도 된 육송이 있었습니다. 팻말도 하나 붙어 있었는데, “허리를 숙이고 나무를 한번 올려다보세요.”라는 글귀와 함께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나무 앞에서 서서 허리를 숙인 채 고개를 들어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올려다보자. 정면에서 볼 때와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정면에서 보는 모습이 그저 준수하기만 한 느낌이라면, 허리를 숙여 올려다보았을 때의 모습은 속이 꽉 찬 느낌이다. 줄기와 가지가 굽이굽이 뻗어 있고 겹겹이 쌓인 표피가 세월을 잘 이겨낸 훈장처럼 그 모습을 드러낸다. 특히 줄기와 가지가 꿈틀대듯 뻗은 모습은 정면에서 바라볼 땐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겉모습만 슬쩍 봐서는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괴로운 세월 한 토막은 간직하고 산다. 겉보기에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도 의외로 멋진 구석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다. 누군가를 제대로 알려면, 보이는 것 이면에 감추어진 부분까지 시간을 두고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허리를 숙이고 잘 올려다보지 않으면 절대로 보이지 않는 육송의 비밀처럼 말이다.

멋진 글이지요? 오늘 설교의 제목은 ‘다르게 보기’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과 함께 ‘본다’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본다’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늘 보고 있기에, 그저 무미건조하게 들릴 수도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본다’라는 말에는 상당히 많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그 안에는 신비로움도 있습니다.
사실 모든 종교와 예술, 문학, 철학은 보는 법에 관한 해설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과학이나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우리가 그동안 보아왔던 것들, 익숙한 것들을 새롭게 보게 하며, 다르게 볼 수 있도록 말을 걸어옵니다. 사진이나 그림 등 모든 예술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시각’, 다시 말하면 ‘관점’입니다. 소설이나 문학 역시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던 것들을 다른 시각에서 보도록 해 줍니다. 철학이나 종교는 늘 바라보고 있는 것들 속에서 깨달음을 얻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과학이나 다양한 학문 역시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의 원리와 방식을 알려주며 밝히기 위해 노력합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분 가운데서도 ‘다르게 보기’라는 말이 익숙하게 들리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공부나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보는 말씀이지만, 다른 시각에서 살펴보면 또 다른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정된 시각에서 보는 게 아니라 늘 새로운 시각에서 사람들을 보고, 교회를 보고, 우리의 신앙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 본문의 맥락을 살펴보면 삭개오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내용입니다. 삭개오의 이야기입니다. 옛날 성경에는 그가 ‘뽕나무 위에 올라갔다’는 표현이 있어서 삭개오는 늘 뽕나무와 연관되어 기억되곤 합니다. 또 오늘 본문을 접하면서 그동안 늘 우리 눈에 들어왔던 단어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세리’, ‘부자’, ‘키가 작은’, ‘죄인’, ‘돌무화과나무’. 아마 이런 단어들이 우리의 관심을 끌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껏 우리가 크게 주목하지 않던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본다’라는 단어입니다.
사실 이 ‘본다’라는 단어는 오늘 본문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3절을 보면, “그가 예수께서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4절을 보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라고 되어 있고, 5절에도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라고 기술됩니다. 7절에서도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그리고 8절에서도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라는 구절이 이어집니다. ‘본다’라는 표현이 상당히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는 보고 있는 주체가 크게 세 명이 등장함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삭개오’입니다. 두 번째는 삭개오를 보고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세 번째로는 삭개오의 집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있는 ‘군중’입니다. 바로 이 세 부류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보는 사람들, 즉 주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19장만 따로 떼어 보기는 어려운 본문입니다. 앞에 나오는 18장과 연결하면 더욱 의미가 살아납니다. 누가복음 18장 즉 오늘 본문 바로 앞장에는 삭개오 이야기와 연결되는 두 주제가 나타납니다.
첫 번째 주제는 ‘부자’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영생을 얻기 위해 당신을 찾아온 부자를 만나십니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길 원하던 사람이었고, 나름대로 율법을 잘 지키며 살던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이어 19장에서도 주님은 또 다른 부자를 만나십니다. 그가 바로 삭개오입니다. 세리이면서 사람들에게 따돌림받으며 죄인 취급 받던 사람, 그가 부자 삭개오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두 부자 중 진리와 영생을 갈구하던 부자는 도리어 근심하며 돌아갔고, 죄인 취급 받으며 그 와중에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세리 부자는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어 구원까지 얻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합니다. 이것이 누가복음 18장과 19장에서 벌어지는 또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이어 두 번째로 보이는, 오늘 본문과 연관된 또 다른 주제 하나는 ‘본다’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마지막 단락은 보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 한 맹인이 길가에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 맹인은 나사렛 예수가 그곳을 지나가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눅18:38) 그때 예수님이 그곳에서 멈추며 그에게 다가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눅18:41)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맹인은 대답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눅18:41) 그래서 18장 마지막 절은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전해줍니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누가복음 18:43)

그런 뒤 이어지는 본문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눅19:1) 이 말씀 이후에 나오는 내용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움직이는 장면입니다. 18장과 19장을 이어 생각해 보면, 누가복음 18장에는 맹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보기를 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저 무조건 보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무엇을 볼 것인가’, ‘누구를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저 무언가를 보고 싶어 했던 사람이 누가복음 18장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9장으로 넘어가면, 새로운 보고 싶음이 나타납니다. 또 다른 차원의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삭개오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다른 어떤 것을 보고자 하는 사람이 아닌,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사람 삭개오입니다. 이와 같은 배경 아래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 삭개오는 간절한 시선으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본문에는 보기를 원하는 세 부류의 주체가 등장합니다. 그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예수님을 보기 원하는 ‘삭개오’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삭개오는 키가 작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자 했으나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서 그분을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런 삭개오의 관점에서 오늘의 상황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아마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거리로 나왔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곳에 먼지들이 날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을 것입니다. 키가 작았기에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올려다보아야만 했겠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보였을 것입니다.
당시 세리는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세금을 거둬 로마 정부에 바치고, 남는 것을 자기 것으로 착복하는 자가 세리였기에, 부자가 될 수는 있어도 다른 이들의 존경이나 존중을 받기는 어려웠습니다. 즉 세리는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가 거리에 나올 때, 작은 체구로 거리를 서성이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이곳저곳을 달려가고 있을 때, 사람들이 그에게 보내는 눈빛은 아마도 싸늘하고 차가웠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지금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을까요? 본문을 근거로 본다면, 단순한 호기심 정도로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분은 어떤 생김새일까? 그분은 어떤 느낌일까? 그분의 옷차림은 어떨까?’ 이처럼 그분의 외모에서 풍기는 모습을 보고자 거리로 나섰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싸늘한 사람들의 눈빛이 두려워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는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한 방법이 어쩌면 그것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그를 존중하거나 우대하지 않았으므로, 예수께로 그를 안내하는 이도 없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사람들이 그를 죄인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기는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저 멀찍이 높은 곳에서, 나무 위로 올라가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삭개오의 현실입니다.

< 예수님의 눈길은 자비와 긍휼로 가득합니다. >

이제 두 번째 주체가 나옵니다. 삭개오를 주목하시고 다가오셔서 그를 쳐다보시는 ‘예수님’의 눈길이 보입니다. 5절입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누가복음 19:5)

삭개오에게 다가오셨을 때, 예수님은 그를 올려다보셨습니다. 마치 분재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듯이, 그에게 있던 상처와 굴곡을 이미 발견하신 듯합니다. 왜 그가 거기까지 올라가게 되었는지, 그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는지, 키가 작아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비록 세리의 일을 하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돌무화과나무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올라가는 그의 심정은 어떠했는지…. 그 모든 것을 예수님은 꿰뚫어 보시는 듯합니다. 그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눈길에 들어온 듯 보입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다가가 한마디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19:5) 이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사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예수님에게 먼저 발견되었습니다. 그분에게 보여진 것입니다. 삭개오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늘 이렇게 남이 보지 못하는 깊은 속을 보십니다. 사람들의 아픔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시선으로 창녀들을 보셨습니다. 그런 시각 곧 새로운 시각으로 세리를 보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보셨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일그러지고 구부러진 인생의 매듭을 아파하시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성경 여러 곳에 예수님이 사람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불쌍히 여기면서 기적을 베풀어 주시고, 불쌍히 여기면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불쌍히 여기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심지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서도 그들의 겉모습만 보지 않으시고, 그들 속에 있는 모습을 보시며 “오! 주님,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중보하셨습니다. 우리의 내면을 깊이 이해하시고, 우리의 살아온 날들과 그 모든 매듭을 끌어안으시며,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예수님입니다.
만약 주님이 우리의 겉모습이나 행위만 보셨더라면,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한계를 아셨기에, 우리의 더러움의 근원을 아셨기에,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죄의 노예가 되었는지를 아셨기에, 우리 주님은 기꺼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와 같은 위대한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은 우리를 지켜보시며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바라봄, 그분이 보시는 방식입니다.

< 군중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시선으로 삭개오와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나타나는 보는 주체가 있습니다. 사람들 곧 군중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평가하던 군중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이 장면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누가복음 19:7)

그들은 늘 보던 방식으로 사람들을 봅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그들 눈에 세리는 늘 죄인이었고, 삭개오도 그런 부류의 하나일 뿐입니다. 한 번 고정된 자신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르게 보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군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강하게 비판하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대제사장들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 보고 있는 틀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다르게 보는 것을 죄악시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르게 보는 것을 정죄하곤 했습니다. 그들은 세리를 다르게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좁은 시야에서 남을 평가하고 가늠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삭개오를 가리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임이로다.”(눅19:9) 다르게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이 분명히 다른, 사람들과 예수님의 관점의 차이입니다.

< 삭개오의 시선이 달라지자 그의 인생이 변화됩니다. >

오늘 이야기에서 하이라이트는 삭개오가 예수님에게 약속하는 장면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누가복음 19:8)

여기서 질문해 봅니다. 삭개오의 변화는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요? 물론 예수님이 자신을 알아주시고, 자신의 집에 머무르시게 된 것에 대한 감격과 감사로 일어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를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삭개오가 나무 위로 올라갔을 때입니다. 그는 키가 작았습니다. 늘 세금을 받기 위해 사람들을 만났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금을 내지 않으려 했을 것이고 피하려 했겠지요. 그러한 그들을 찾아다니며 위압적으로 세금을 받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도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삭개오가 보았던 것은 그들의 차가운 눈빛이었습니다. 또한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도망다니는 치사한 사람들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비난하는 그와 같은 모습을 늘 그는 그곳에서 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랐을 때, 그는 또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간절히 찾으며 이리저리 따라가는 군중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눈길은 한없이 불쌍해 보였고, 예수님에게 은혜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에는 힘이 없었습니다.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헐벗고 굶주린 채로 예수님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것이 그가 나무 위로 올라갔을 때 볼 수 있었던 장면입니다.
그 순간 그의 시각이 변화됩니다. 그 시각의 변화가 그를 바꾸기 시작합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나누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가 만약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서 그들을 다른 관점에서 보지 않았다면, 아마도 일어날 수 없던 결단이었을 것입니다.

< 우리의 시선을 달리하여 아름다운 삶을 창조합시다. >

어느 날 공항버스를 탔을 때입니다. 공항버스가 승강장에 도착했습니다. 기사분이 내리셨는데, 굉장히 피곤한 얼굴이었습니다. 얼굴에 친절함이라곤 하나도 엿보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언뜻 보고는 저는 바로 판단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저렇게 살면 안 되는데…. 왜 같은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만 예의를 갖추면 모두가 행복할 것 같은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예의를 지키지 못할까….’ 하는 안타까움도 들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커피를 들고 왔는데 커피를 갖다 버리라며 호통까지 쳤습니다. 급히 커피를 버리기 위해 가는 사람에게 차가 떠날지 모르니 빨리 뛰어갔다오라는 이야기도 합니다. 버스에서 내릴 때는 짐표를 갖고 있어야 한다며 손에 잡고 있으라고까지 명령조로 이야기합니다. 굉장히 불쾌했습니다. ‘회사에 신고할까? 아니면 점잖게 타일러 줄까?’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정말 나는 하기 싫은 일을 해요.’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언가 말해 주고 싶은 마음이 목까지 올라왔는데, 그 사이 버스가 공항을 출발했습니다.
버스는 직행이 아니라 여러 곳에 정차하는 버스였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님이 하시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정차하고, 내려서 표를 받아 확인하고, 짐칸에 있는 짐을 내려주고, 다시 운전석으로 올라와 문을 닫고 출발합니다. 더욱이 이 버스가 정차하는 곳이 언제나 안전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차를 세우기에도 넉넉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차들이 몰려 있는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야 했고, 뒷차들이 경적을 울리는 사이에 내리는 승객들의 짐표를 확인하고, 짐을 화물칸에서 꺼내 주어야 했으며, 다시 빠르게 버스에 올라타 운전을 해야 하는 일을 반복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느 장소에서는 버스전용차선으로 들어가 정차해야 했습니다. 버스 정류장에 사람들을 내리게 하고, 짐을 나눠 줍니다. 뒤에서 다른 버스들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경적을 울리고 난리를 칩니다. 버스를 세우면, 짐을 내리고, 다시 뛰어 올라타는 그의 이마에서 땀이 물 흐르듯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저에게 그를 향한 연민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고생스러울까? 참 힘들겠다. 매일매일 차를 세울 때마다 얼마나 불안할까? 차를 안전한 자리에 세우지 못하고 뛰어 내려가는 저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버스를 세울 때마다 경적을 울려대는 소리를 뒤로 하고, 바삐 움직여야 하는 저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까? 아마도 그 모습을 가족들이 보았다면 어떠했을까? 아마도 아내가 보았다면 당장 그만두라고 하지 않을까? 자녀들이 보았다면 “아버지, 나도 도울게요.”라고 달려들지 않았을까?’
저는 그 모습을 보며 잠시나마 그를 미워할 뻔했던 제가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회사가 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도 그만큼 힘들고 어렵지 않습니까?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표면적으로 대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대할 때는 복합적으로 내 모든 것을 알고 대해 주기를 바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와 기도할 때, 주님은 우리를 깊이 보시고 온전한 안식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죄인으로 대하면 상종 못 할 인간이 되기도 하고, 똑같은 사람이라도 우리가 형제로 대하면 안쓰럽고 불쌍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다르게 보는 시각이 열리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보이던 아내의 모습이 다른 모습으로 보이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보이던 남편의 모습이 다른 모습으로 보이면 좋겠습니다. 부모님의 모습이, 또 자식의 모습이 그러면 좋겠습니다. 우리 소망교회 성도님들의 모습이 서로에게 다르게 보이면 좋겠습니다. 긍휼함으로 넘치는, 사랑으로 넘치는, 이해가 넘치는 모습으로 서로의 곁에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저는 연초에 우리 교회 목회의 방향을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신앙의 예술성을 회복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예술적 신앙을 만들어가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술의 속성이 무엇인지 잘 아시지요? 예술의 속성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다르게 보기’입니다. 다르게 보아야 아름다운 그림이 나오고, 아름다운 조각도 나오며, 아름다운 음악이 나오고,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창의력, 새로움, 활력은 바로 다르게 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정을 다르게 보고, 우리 교회를 다르게 보고, 우리 성도님들을 다르게 보며, 과거의 원수가 친구로 변하고, 과거의 상처가 도리어 상급이 되는 아름다운 변화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바로 이러한 시선의 변화를 기대하시며,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Seeing Differently

Luke 19:1-10

I once visited a famous bonsai garden in Jeju Island, Spirited Garden, visited by renowned figures such as President Hu Jintao. There, I saw a 150-year-old pine tree, and under it a sign read, “Look up from below.” The sign continued to explain that the pine tree looked completely different from below with its many twisting branches that have stood the test of time. People are the same. You cannot know a person completely with a cursory glance. You need to see all their hidden parts. Just like the old pine tree, you need to see a person from a different perspective to really know him.

What does it mean “to see”? In a sense, religion, art, literature, and philosophy are all commentaries on “how to see.” They guide us to see things in a new, different perspective. Novels, paintings, art, philosophy, humanities, and even science attempt to make humans see things differently, discover things that are unseen, or see things more clearly. It’s the same for Bible study and sermons, too. It’s helpful to see a familiar passage in a different light. This applies to our faith, too. We must continuously see people, our church, and our faith from a fresh perspective.

We know the story about Zacchaeus all too well. Words that we associate with this passage usually include tax collector, wealthy, short, sycamore-fig tree, and sinner. But there is an important word that we have not yet focused on: “to see.” Verbs related to seeing such as to see, to look up, and to look appear many times in this passage. In fact, they are the most frequently used words in this passage. Zacchaeus wanted “to see who Jesus was” (verse 3), so “he climbed a sycamore-fig tree to see him” (verse 4). “When Jesus reached the spot, he looked up and said to him, ‘Zacchaeus, come down immediately. I must stay at your house today.’” (verse 5)The crowd“saw this and began to mutter” (verse 7), but “Zacchaeus stood up and said to the Lord, ‘Look, Lord! Here and now I give half of my possessions to the poor.’” (verse 8)

In today’s passage, there are three main agents that see: First, Zacchaeus who wanted to see Jesus;second, Jesus who saw Zacchaeus; and third, the people who saw Jesus going into the house of Zacchaeus.

The preceding chapter is very interesting. In Luke 18 we discover two themes related to the story of Zacchaeus: wealthy man and to see. First, wealthy man. In chapter 18 a rich man asks Jesus what he must do to inherit eternal life. In chapter 19 Jesus meets another rich man, Zacchaeus the tax collector. Paradoxically, it is not the rich man who seeks eternal life but Zacchaeus that gets saved.

Second, to see. In chapter 18 a blind beggar says to Jesus, “Lord, I want to see.” Thechapter concludes with this verse: “Immediately he received his sight and followed Jesus, praising God. When all the people saw it, they also praised God.” (Luke 18:43)Then comes today’s passage about Zacchaeus which starts with “Jesus entered Jericho and was passing through.” (Luke 19:1)

Let’s take a deeper look at today’s passage. First, Zacchaeus who wanted to see Jesus.Let’s imagine the scene from his point of view. He probably had to look up at the crowd because of his short height. And when people looked down upon him, their eyes were filled with scorn because tax collectors were much hated at the time. Tax collectors stole from the people by taking money from the taxes collected for the Roman government. But this sinner Zacchaeus wanted to see Jesus. It was probably out of curiosity. He probably just wanted to see what Jesus looked like, what he was wearing,his overall impression, and so on. So, he climbed up a sycamore-fig tree. That was the only way he could get a glimpse. No one would make way—particularly for someone like him. He climbedup a tree to get a teeny, weeny glimpse. But, then, Jesus our Lord saw him.

Second, Jesus who spots Zacchaeus and approaches him. It says, “When Jesus reached the spot, he looked up and said to him, ‘Zacchaeus, come down immediately. I must stay at your house today.’” (Luke 19:5) When Jesus approached Zacchaeus, he was looking up at him. Jesus didn’t look at Zacchaeus from above. It was from below, just like that old pine tree I saw in the bonsai garden. Jesus saw all the twist and turns and ups and downs in his life. He saw all the hurt and pain. He saw why he had become such a twisted man. He saw Zacchaeus as a child. How he was hurt because of his height. He saw Zacchaeus as a tax collector. How he hated doing it although it made him rich. And he saw how he felt when he climbed up that tree, embarrassing himself. Jesus saw through Zacchaeus.

Zacchaeus wanted to see Jesus. But instead it was Jesus who saw him. He gets found by Jesus. Jesus came to him with compassion. This is the gospel.

Jesus always sees deep inside a person. He seesour hurt and pain. That is how he saw tax collectors and prostitutes. His heart went out to them. He had compassion for them. In the Bible we see many verses that say Jesus had compassion on them. With compassion, he performed miracles and declared his message. He didn’t look at the appearance of the crowd who crucified him. With compassion he said, “Father, forgive them, for they do not know what they are doing.” Jesus loves us, understands us deeply, and embraces every part of us—even our pasts and pains. If he had only seen what we are on the outside, he wouldn’t have given his life for us. He wanted to heal us because he knew that our sins and ugliness came from sin, that is, a broken relation with God. That is why he gave his life for us. This is the gospel.

We are not worthy of that love. But Jesus had compassion on us. He knew our pain, hurt, despair, and sighs. He gave himself for us willingly out of compassion. This is the gospel. And with such a compassionate love he prays for us—despite our failures and weaknesses. He understands us completely.

The greatness of Zacchaeus was that he wanted to see Jesus. He was seen by Jesus because he wanted to see him. Dear Church, do you have a desire to see our Lord? I pray that we all have this deep desire like the lyrics of hymn 85 below:
Je-sus, the ver-y thought of Thee
With sweet-ness fills my breast;
But sweet-er far Thy face to see,
And in Thy pres-ence rest.

Third, the crowd who saw Jesus going into the house of Zacchaeus. This was what the crowd said when it saw Jesus going into Zacchaeus’ house: “All the people saw this and began to mutter, ‘He has gone to be the guest of a sinner.’” (Luke 19:7)The crowd saw things the way it always did. There was no change of view. A tax collector was always a sinner, and Zacchaeus was a sinner. That was that. Once the crowd had made up its mind, there was no changing it. It was impossible for them to see things differently.

The Pharisees, teachers of the law, and high priests that Jesus reprimanded were the same. They refused to change their views and their way of thinking. Rather, they considered it a sin to think differently. They were incapable of seeing tax collectors differently. However, Jesus said to Zacchaeus, “this man, too, is a son of Abraham.”

The climax of today’s story is Zacchaeus making a promise to Jesus. “But Zacchaeus stood up and said to the Lord, ‘Look, Lord! Here and now I give half of my possessions to the poor, and if I have cheated anybody out of anything, I will pay back four times the amount.’” (Luke 19:8)What brought about this change of heart? Of course, it probably had to do with Jesus acknowledging him and coming to his home. Zacchaeus was touched and grateful. Yet, there is one more thing that we must pay attention to.

It was when he was up on the sycamore-fig tree. Zacchaeus was short. When he went out to collect taxes, people looked at him coldly and avoided him. It would have been extremely difficult to collect taxes from such people. But when he went up on that tree, he saw something different. The people he saw down below were just a helpless bunch following Jesus. They were hungry, poor, ill-clothed, and powerless. They looked pitiful. Then he saw Jesus.

A change in his perspective changed his heart. He promised Jesus that he would give half of his possessions to the poor. He started to see things differently.

I once met an airport bus driver who was very unkind. He barked at the passengers and his expression was cold. It was as if bus-driving was the last thing hewoulddo on earth. I thought, ‘Why can’t he be a bit more kind? Why can’t he cheer up a little? Should I make a complaint?’ Then the bus started to move. It stopped at many stops. And how busy the bus driver was! He had to get off at every stop to lift the luggage, check everyone’s tickets, and so on. The traffic was terrible, and at some stops the cars behind would honk at the driver who was busily moving the luggage. And how hot it was! As the bus driver did his endless chores, he was sweating heavily. When I saw this, my heart changed. I felt sorry for him. How hard this job must be for him! And I felt ashamed that I had disliked him at first.

Dear Church, changing our perspective changes our attitude toward people. If you see someone as a sinner, you can’t stand being around him. But when you see him as a brother, you feel compassion for him.

I pray that weall have a new perspective.I praythat husbands and wivessee each other differently.Ipray that parentssee their children differently, and vice versa.I praythat our Church memberssee each other differently.I pray God does this in us.I hope enemies become friends and past hurts become badges of honor. I pray that these changeswill happen in us. Dear Church, our Lord is waiting for us to see things differently.

btn_switch

누가복음 19: 1 ~ 10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 관점을 달리하면 다르게 보입니다. >

제주도에 가면 ‘생각하는 정원’이라는 분재정원이 있습니다. 저도 오래전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유명한 분들도 많이 다녀가셨고 합니다. 그 정원에 150년 정도 된 육송이 있었습니다. 팻말도 하나 붙어 있었는데, “허리를 숙이고 나무를 한번 올려다보세요.”라는 글귀와 함께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나무 앞에서 서서 허리를 숙인 채 고개를 들어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올려다보자. 정면에서 볼 때와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정면에서 보는 모습이 그저 준수하기만 한 느낌이라면, 허리를 숙여 올려다보았을 때의 모습은 속이 꽉 찬 느낌이다. 줄기와 가지가 굽이굽이 뻗어 있고 겹겹이 쌓인 표피가 세월을 잘 이겨낸 훈장처럼 그 모습을 드러낸다. 특히 줄기와 가지가 꿈틀대듯 뻗은 모습은 정면에서 바라볼 땐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겉모습만 슬쩍 봐서는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괴로운 세월 한 토막은 간직하고 산다. 겉보기에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도 의외로 멋진 구석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다. 누군가를 제대로 알려면, 보이는 것 이면에 감추어진 부분까지 시간을 두고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허리를 숙이고 잘 올려다보지 않으면 절대로 보이지 않는 육송의 비밀처럼 말이다.

멋진 글이지요? 오늘 설교의 제목은 ‘다르게 보기’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과 함께 ‘본다’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본다’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늘 보고 있기에, 그저 무미건조하게 들릴 수도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본다’라는 말에는 상당히 많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그 안에는 신비로움도 있습니다.
사실 모든 종교와 예술, 문학, 철학은 보는 법에 관한 해설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과학이나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우리가 그동안 보아왔던 것들, 익숙한 것들을 새롭게 보게 하며, 다르게 볼 수 있도록 말을 걸어옵니다. 사진이나 그림 등 모든 예술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시각’, 다시 말하면 ‘관점’입니다. 소설이나 문학 역시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던 것들을 다른 시각에서 보도록 해 줍니다. 철학이나 종교는 늘 바라보고 있는 것들 속에서 깨달음을 얻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과학이나 다양한 학문 역시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의 원리와 방식을 알려주며 밝히기 위해 노력합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분 가운데서도 ‘다르게 보기’라는 말이 익숙하게 들리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공부나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보는 말씀이지만, 다른 시각에서 살펴보면 또 다른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정된 시각에서 보는 게 아니라 늘 새로운 시각에서 사람들을 보고, 교회를 보고, 우리의 신앙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 본문의 맥락을 살펴보면 삭개오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내용입니다. 삭개오의 이야기입니다. 옛날 성경에는 그가 ‘뽕나무 위에 올라갔다’는 표현이 있어서 삭개오는 늘 뽕나무와 연관되어 기억되곤 합니다. 또 오늘 본문을 접하면서 그동안 늘 우리 눈에 들어왔던 단어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세리’, ‘부자’, ‘키가 작은’, ‘죄인’, ‘돌무화과나무’. 아마 이런 단어들이 우리의 관심을 끌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껏 우리가 크게 주목하지 않던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본다’라는 단어입니다.
사실 이 ‘본다’라는 단어는 오늘 본문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3절을 보면, “그가 예수께서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4절을 보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라고 되어 있고, 5절에도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라고 기술됩니다. 7절에서도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그리고 8절에서도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라는 구절이 이어집니다. ‘본다’라는 표현이 상당히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는 보고 있는 주체가 크게 세 명이 등장함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삭개오’입니다. 두 번째는 삭개오를 보고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세 번째로는 삭개오의 집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있는 ‘군중’입니다. 바로 이 세 부류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보는 사람들, 즉 주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19장만 따로 떼어 보기는 어려운 본문입니다. 앞에 나오는 18장과 연결하면 더욱 의미가 살아납니다. 누가복음 18장 즉 오늘 본문 바로 앞장에는 삭개오 이야기와 연결되는 두 주제가 나타납니다.
첫 번째 주제는 ‘부자’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영생을 얻기 위해 당신을 찾아온 부자를 만나십니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길 원하던 사람이었고, 나름대로 율법을 잘 지키며 살던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이어 19장에서도 주님은 또 다른 부자를 만나십니다. 그가 바로 삭개오입니다. 세리이면서 사람들에게 따돌림받으며 죄인 취급 받던 사람, 그가 부자 삭개오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두 부자 중 진리와 영생을 갈구하던 부자는 도리어 근심하며 돌아갔고, 죄인 취급 받으며 그 와중에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세리 부자는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어 구원까지 얻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합니다. 이것이 누가복음 18장과 19장에서 벌어지는 또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이어 두 번째로 보이는, 오늘 본문과 연관된 또 다른 주제 하나는 ‘본다’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마지막 단락은 보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 한 맹인이 길가에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 맹인은 나사렛 예수가 그곳을 지나가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눅18:38) 그때 예수님이 그곳에서 멈추며 그에게 다가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눅18:41)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맹인은 대답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눅18:41) 그래서 18장 마지막 절은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전해줍니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누가복음 18:43)

그런 뒤 이어지는 본문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눅19:1) 이 말씀 이후에 나오는 내용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움직이는 장면입니다. 18장과 19장을 이어 생각해 보면, 누가복음 18장에는 맹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보기를 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저 무조건 보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무엇을 볼 것인가’, ‘누구를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저 무언가를 보고 싶어 했던 사람이 누가복음 18장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9장으로 넘어가면, 새로운 보고 싶음이 나타납니다. 또 다른 차원의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삭개오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다른 어떤 것을 보고자 하는 사람이 아닌,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사람 삭개오입니다. 이와 같은 배경 아래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 삭개오는 간절한 시선으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본문에는 보기를 원하는 세 부류의 주체가 등장합니다. 그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예수님을 보기 원하는 ‘삭개오’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삭개오는 키가 작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자 했으나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서 그분을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런 삭개오의 관점에서 오늘의 상황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아마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거리로 나왔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곳에 먼지들이 날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을 것입니다. 키가 작았기에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올려다보아야만 했겠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보였을 것입니다.
당시 세리는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세금을 거둬 로마 정부에 바치고, 남는 것을 자기 것으로 착복하는 자가 세리였기에, 부자가 될 수는 있어도 다른 이들의 존경이나 존중을 받기는 어려웠습니다. 즉 세리는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가 거리에 나올 때, 작은 체구로 거리를 서성이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이곳저곳을 달려가고 있을 때, 사람들이 그에게 보내는 눈빛은 아마도 싸늘하고 차가웠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지금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을까요? 본문을 근거로 본다면, 단순한 호기심 정도로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분은 어떤 생김새일까? 그분은 어떤 느낌일까? 그분의 옷차림은 어떨까?’ 이처럼 그분의 외모에서 풍기는 모습을 보고자 거리로 나섰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싸늘한 사람들의 눈빛이 두려워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는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한 방법이 어쩌면 그것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그를 존중하거나 우대하지 않았으므로, 예수께로 그를 안내하는 이도 없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사람들이 그를 죄인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기는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저 멀찍이 높은 곳에서, 나무 위로 올라가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삭개오의 현실입니다.

< 예수님의 눈길은 자비와 긍휼로 가득합니다. >

이제 두 번째 주체가 나옵니다. 삭개오를 주목하시고 다가오셔서 그를 쳐다보시는 ‘예수님’의 눈길이 보입니다. 5절입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누가복음 19:5)

삭개오에게 다가오셨을 때, 예수님은 그를 올려다보셨습니다. 마치 분재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듯이, 그에게 있던 상처와 굴곡을 이미 발견하신 듯합니다. 왜 그가 거기까지 올라가게 되었는지, 그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는지, 키가 작아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비록 세리의 일을 하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돌무화과나무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올라가는 그의 심정은 어떠했는지…. 그 모든 것을 예수님은 꿰뚫어 보시는 듯합니다. 그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눈길에 들어온 듯 보입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다가가 한마디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19:5) 이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사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예수님에게 먼저 발견되었습니다. 그분에게 보여진 것입니다. 삭개오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늘 이렇게 남이 보지 못하는 깊은 속을 보십니다. 사람들의 아픔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시선으로 창녀들을 보셨습니다. 그런 시각 곧 새로운 시각으로 세리를 보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보셨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일그러지고 구부러진 인생의 매듭을 아파하시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성경 여러 곳에 예수님이 사람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불쌍히 여기면서 기적을 베풀어 주시고, 불쌍히 여기면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불쌍히 여기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심지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서도 그들의 겉모습만 보지 않으시고, 그들 속에 있는 모습을 보시며 “오! 주님,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중보하셨습니다. 우리의 내면을 깊이 이해하시고, 우리의 살아온 날들과 그 모든 매듭을 끌어안으시며,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예수님입니다.
만약 주님이 우리의 겉모습이나 행위만 보셨더라면,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한계를 아셨기에, 우리의 더러움의 근원을 아셨기에,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죄의 노예가 되었는지를 아셨기에, 우리 주님은 기꺼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와 같은 위대한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은 우리를 지켜보시며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바라봄, 그분이 보시는 방식입니다.

< 군중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시선으로 삭개오와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나타나는 보는 주체가 있습니다. 사람들 곧 군중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평가하던 군중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이 장면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누가복음 19:7)

그들은 늘 보던 방식으로 사람들을 봅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그들 눈에 세리는 늘 죄인이었고, 삭개오도 그런 부류의 하나일 뿐입니다. 한 번 고정된 자신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르게 보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군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강하게 비판하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대제사장들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 보고 있는 틀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다르게 보는 것을 죄악시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르게 보는 것을 정죄하곤 했습니다. 그들은 세리를 다르게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좁은 시야에서 남을 평가하고 가늠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삭개오를 가리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임이로다.”(눅19:9) 다르게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이 분명히 다른, 사람들과 예수님의 관점의 차이입니다.

< 삭개오의 시선이 달라지자 그의 인생이 변화됩니다. >

오늘 이야기에서 하이라이트는 삭개오가 예수님에게 약속하는 장면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누가복음 19:8)

여기서 질문해 봅니다. 삭개오의 변화는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요? 물론 예수님이 자신을 알아주시고, 자신의 집에 머무르시게 된 것에 대한 감격과 감사로 일어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를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삭개오가 나무 위로 올라갔을 때입니다. 그는 키가 작았습니다. 늘 세금을 받기 위해 사람들을 만났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금을 내지 않으려 했을 것이고 피하려 했겠지요. 그러한 그들을 찾아다니며 위압적으로 세금을 받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도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삭개오가 보았던 것은 그들의 차가운 눈빛이었습니다. 또한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도망다니는 치사한 사람들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비난하는 그와 같은 모습을 늘 그는 그곳에서 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랐을 때, 그는 또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간절히 찾으며 이리저리 따라가는 군중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눈길은 한없이 불쌍해 보였고, 예수님에게 은혜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에는 힘이 없었습니다.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헐벗고 굶주린 채로 예수님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것이 그가 나무 위로 올라갔을 때 볼 수 있었던 장면입니다.
그 순간 그의 시각이 변화됩니다. 그 시각의 변화가 그를 바꾸기 시작합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나누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가 만약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서 그들을 다른 관점에서 보지 않았다면, 아마도 일어날 수 없던 결단이었을 것입니다.

< 우리의 시선을 달리하여 아름다운 삶을 창조합시다. >

어느 날 공항버스를 탔을 때입니다. 공항버스가 승강장에 도착했습니다. 기사분이 내리셨는데, 굉장히 피곤한 얼굴이었습니다. 얼굴에 친절함이라곤 하나도 엿보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언뜻 보고는 저는 바로 판단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저렇게 살면 안 되는데…. 왜 같은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만 예의를 갖추면 모두가 행복할 것 같은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예의를 지키지 못할까….’ 하는 안타까움도 들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커피를 들고 왔는데 커피를 갖다 버리라며 호통까지 쳤습니다. 급히 커피를 버리기 위해 가는 사람에게 차가 떠날지 모르니 빨리 뛰어갔다오라는 이야기도 합니다. 버스에서 내릴 때는 짐표를 갖고 있어야 한다며 손에 잡고 있으라고까지 명령조로 이야기합니다. 굉장히 불쾌했습니다. ‘회사에 신고할까? 아니면 점잖게 타일러 줄까?’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정말 나는 하기 싫은 일을 해요.’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언가 말해 주고 싶은 마음이 목까지 올라왔는데, 그 사이 버스가 공항을 출발했습니다.
버스는 직행이 아니라 여러 곳에 정차하는 버스였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님이 하시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정차하고, 내려서 표를 받아 확인하고, 짐칸에 있는 짐을 내려주고, 다시 운전석으로 올라와 문을 닫고 출발합니다. 더욱이 이 버스가 정차하는 곳이 언제나 안전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차를 세우기에도 넉넉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차들이 몰려 있는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야 했고, 뒷차들이 경적을 울리는 사이에 내리는 승객들의 짐표를 확인하고, 짐을 화물칸에서 꺼내 주어야 했으며, 다시 빠르게 버스에 올라타 운전을 해야 하는 일을 반복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느 장소에서는 버스전용차선으로 들어가 정차해야 했습니다. 버스 정류장에 사람들을 내리게 하고, 짐을 나눠 줍니다. 뒤에서 다른 버스들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경적을 울리고 난리를 칩니다. 버스를 세우면, 짐을 내리고, 다시 뛰어 올라타는 그의 이마에서 땀이 물 흐르듯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저에게 그를 향한 연민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고생스러울까? 참 힘들겠다. 매일매일 차를 세울 때마다 얼마나 불안할까? 차를 안전한 자리에 세우지 못하고 뛰어 내려가는 저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버스를 세울 때마다 경적을 울려대는 소리를 뒤로 하고, 바삐 움직여야 하는 저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까? 아마도 그 모습을 가족들이 보았다면 어떠했을까? 아마도 아내가 보았다면 당장 그만두라고 하지 않을까? 자녀들이 보았다면 “아버지, 나도 도울게요.”라고 달려들지 않았을까?’
저는 그 모습을 보며 잠시나마 그를 미워할 뻔했던 제가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회사가 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도 그만큼 힘들고 어렵지 않습니까?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표면적으로 대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대할 때는 복합적으로 내 모든 것을 알고 대해 주기를 바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와 기도할 때, 주님은 우리를 깊이 보시고 온전한 안식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죄인으로 대하면 상종 못 할 인간이 되기도 하고, 똑같은 사람이라도 우리가 형제로 대하면 안쓰럽고 불쌍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다르게 보는 시각이 열리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보이던 아내의 모습이 다른 모습으로 보이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보이던 남편의 모습이 다른 모습으로 보이면 좋겠습니다. 부모님의 모습이, 또 자식의 모습이 그러면 좋겠습니다. 우리 소망교회 성도님들의 모습이 서로에게 다르게 보이면 좋겠습니다. 긍휼함으로 넘치는, 사랑으로 넘치는, 이해가 넘치는 모습으로 서로의 곁에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저는 연초에 우리 교회 목회의 방향을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신앙의 예술성을 회복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예술적 신앙을 만들어가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술의 속성이 무엇인지 잘 아시지요? 예술의 속성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다르게 보기’입니다. 다르게 보아야 아름다운 그림이 나오고, 아름다운 조각도 나오며, 아름다운 음악이 나오고,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창의력, 새로움, 활력은 바로 다르게 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정을 다르게 보고, 우리 교회를 다르게 보고, 우리 성도님들을 다르게 보며, 과거의 원수가 친구로 변하고, 과거의 상처가 도리어 상급이 되는 아름다운 변화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바로 이러한 시선의 변화를 기대하시며,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2019년 7월 28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다르게 보기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62장, 294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눅19:1-10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7월 28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본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실, 모든 종교와 예술, 문학, 철학은 이 보는 법에 대한 해설서라 할 수 있습니다. 사진이나 그림, 모든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보는 시각, 관점입니다. 성경공부나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정된 시각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로운 시각에서 사람들을 보며 교회를 보고, 우리의 신앙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의 요약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삭개오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던 단어가 하나 있는데, 바로 “본다”라는 단어(눅19:3, 4, 5, 7, 8절)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명의 주체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1. 보고자 하는 삭개오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자 하였으나 사람들이 많아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삭개오는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한번이라도 보고자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우리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2. 삭개오를 보시는 예수님입니다(눅19:5).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다가오셨을 때, 예수님을 삭개오를 올려다보고 계셨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올라갑니다만, 실제로 그는 예수님에게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보여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늘 그렇게 사람들을 보실 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그 깊은 속을 보셨고, 사람들의 아픔을 보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의 겉모양이나 행위만 보셨다면, 추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복음입니다.

3. 삭개오의 집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있는 군중들입니다(눅19:7). 그들은 늘 보던 방식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 보고 있는 틀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다르게 보는 것을 죄악시 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르게 보는 것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삭개오를 가리켜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가 나무위로 올라갔을 때, 그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불쌍한 양민들, 군중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눈길은 한없이 불쌍해 보였고, 헐벗고 굶주린 군중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의 시각이 변화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내어 놓을 것을 약속합니다(눅19:8). <다르게 보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다르게 만들어 줍니다. 죄인으로 대하면, 상종 못할 인간이비만, 형제로 보이면 안쓰럽고 불쌍하게 보입니다. 우리에게도 새로운 시각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시선의 변화를 기대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누기

1. 익숙한 사람, 환경, 모습들이 새롭게 보였던 경험이 있습니까? 이유가 무엇인지, 함께 나눠보세요.

2. 다르게 보기 시작할 때, 새로운 이해와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새롭게 바라보아야할 대상이 있다면 누구입니까?

어떻게 하면 사랑(변화)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서로 축복하며,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주님께서 보시는 그 시각으로 우리의 시각이 변화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긍휼히 여기며,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시선을 우리의 시력에 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짐을 보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Connection Card

- -